클래식 민족주의 음악가::대표작과 현대 음악
민족주의 음악, 국민주의 음악, 또는 국민 악파는 작곡자가 자기 민족의 의식을 가지고 자기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음악에 담던 19세기 후반 서양의 음악 사조를 일컫는다. 민족주의 음악이 대두되기 전 200여년 가까이 유럽의 뛰어난 음악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낭만주의 운동이 개인의 감정을 강조하자 작곡가들은 각 나라나 지방의 고유한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으며, 자기 나라의 음악 영향을 소중히 여겼다.
음악 양식에 민족적인 것이나 민족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19세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전부를 민족주의 음악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제국주의의 침략 등 어떤 사회적ㆍ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민족적 음악 소재를 작품화하였을 경우에 민족주의 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유럽의 시민 혁명기에 각 민족은 봉건성을 타파하고 통일적 근대 국가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이 때 봉건주의에 투쟁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감정과 감각을 해방하는 낭만주의가 태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각 민족의 정치ㆍ사회적 유대를 나타내기 위해 민족주의 음악이 강력한 사조로서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하여 당시 외국의 지배를 받거나 봉건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 음악이 강조되었다.
민족주의 음악은 주로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민족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민족성을 기저에 깐 음악 형식이나 여러 음악 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문학, 혹은 전설, 고담,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는 중부 유럽이 고전 음악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주변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음악가가 많이 등장하였다.
- 러시아
글린카 이전의 러시아 음악
18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는 아직 음악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으로 생각되어 천한 것이라 하여 귀족이 다룰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순수 기악보다 오페라나 가곡(가사가 있는), 무용을 위한 음악이 존중되어 왔다(이것은 후세의 러시아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의 음악은 거의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존재했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로 러시아인 작곡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맨스'라는 정서적인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 형태가 러시아적 예술가곡으로 탄생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가 강국으로 크게 어필하게 되자 당시 유럽에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국내에서도 민족의식에 각성하여 슬라브 중심사조가 높아졌다. 상류사회에서는 "고뇌하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러시아"의 문학적 사명에 적합한 강력하고 국민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의 욕구가 높아졌다. 그러한 결과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고 그와 같은 사명을 지닌 예술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글린카를 낳았고 이어 러시아 음악의 개화를 가져왔다.
러시아 예술음악의 개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M.I.Glinka, 1804-1857)는 초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 베를리오즈 등 오페라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뒤로는 참된 러시아 국민 오페라의 창조를 목표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침입군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국 이야기 '이반스사니'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황제에 바친 생명〉을 작곡하였다. 러시아 민요의 선율을 많이 사용한 이 오페라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초의 러시아 국민 오페라이다.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1842)나 그 밖의 작품도 민족적 색채에 넘쳐흐르는 민족주의 음악형태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업적으로 뿌리를 뻗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뒤를 잇는 다르고미지스키와 세이로프에 의하여 더욱 확고한 것이 되어 '5인조'의 작곡가들로 그 결실을 맺는다.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지스키(A.S.Dargomyzhsky, 1813-1869)도 러시아 민족의 음악성을 기조로 한 몇 개의 가곡을 작곡하였고 또 그가 죽은 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하여 완성된 오페라 <석상(石像)의 손님>으로 러시아어의 억양이나 악센트의 음악화, 즉 말의 뜻에 음악을 종속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 등 '5인조' 특히 무소르크스키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그들에게 있었던 '민족성'과 '서구의 기술'이라는 2개의 요소를 연장시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와 루빈스타인 형제 및 차이코프스키에 의한 '서구악파'가 다양한 꽃을 피우고 있다.
러시아 5인조
'5인조'라는 것은 서구에서 쓰이는 통칭으로, 원래는 '든든한 친구'라는 이름의 그룹이었다. 조직자인 발라키레프(1837-1910)는 글린카의 뜻에 공명하여 새로운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조에 착수, '든든한 친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1862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무료음악학교를 설립하여 민간으로부터 유능한 음악가를 육성하는 것과 그 학교에서의 연주회로 '5인조'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의 작곡기법보다 러시아 민요의 바탕에 깔린 아름다움과 힘참을 소중히 여겨 스스로 러시아 각지를 돌며 민요채집을 하고 1866년에 <러시아 민요집>을 출판하였다.
세자르 쿠이(1835-1918)도 축성가(築城家)로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이며 보로딘과 마찬가지로 음악가로는 아마추어이며 <대위의 딸> 등 수곡의 오페라와 소수의 관현악곡 외에는 살롱적인 소품이 있을 뿐이며 그것들은 매우 러시아적이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작품이 적다.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는 1865년경부터 교향곡이나 기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관현악곡 <사드코(1898)>로 이미 독자적인 스타일, 즉 민속적 전설을 바탕으로 한 환상성, 극히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 객관적 묘사 등을 전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포리토프이바노프, 그레차니노프, 체레프닌, 스트라빈스키, 미야스코프스키 등이 배출되었다. 또 그 사이에도 <관현악법>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화성상의 독특한 색채나 관현악법의 새로움은 그의 제자, 특히 스트라빈스키 등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 밖에도 라벨이라든가 레스피기 등 후세의 다른 나라 작곡가의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1839-1881)는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아 전문 작곡가로서 성공하려 하였으나 경제적으로 곤란하여 일생을 공무원으로 지냈다. 그의 작품에는 큰 곡은 적으나 모든 곡이 러시아적 풍부함과 근대적 음빛깔이 하나로 되어 자아내는 지적인 구성과 섬세한 울림이 있다.
러시아 음악의 서구화
무소르크스키와 보로딘의 재능으로써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창조한 '5인조'는 슬라브 중심사조의 몰락과 더불어 비교적 빨리 해체되었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은 서구의 아카데믹한 작곡기술과 절대음악을 경시했다. 그들의 작품이 오페라, 가곡, 표제음악으로 되어 있던 점은 이전 시대의 러시아적 음악관 그대로의 계승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만은 국민악파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술적 미숙을 절감하여 서구고전기법을 익혀 작곡에 전념하는 직업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서구악파의 사람들과 가깝다고 하겠다.
서구악파
국민악파의 보수성을 타파하고 러시아 음악에 새 시대를 초래케 하는 움직임은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였으며 조직자로서도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5-1881)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독일이나 체코 등에서 작곡이론과 기악연주의 교사를 초청하여 전문적으로 음악가를 육성하였다. 한편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설립하고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20회나 열어 청중을 계몽하였고, 악단을 조직적으로 통일시키며,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기술과 양식을 존중, 절대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교육을 하여 러시아 음악사상 비로소 '음악문화'를 목표로 한 혁신적 활동을 하였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이 모두 귀족 출신이었는데 대하여 루빈스타인은 새 중간층의 자제이며 처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 직업인의 의식을 지닌 새로운 타입의 음악가였다. 이 루빈스타인의 교실에서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탄생하였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I.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교향곡<비창>을 비롯해서 많은 바이올린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6세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이해하였고 7세 때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후에 그는 법학을 공부하였고 나중에 음악이 좋아 뻬쩨스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다.
그는 평생 우울증을 알았는데 폰 뮤렌달 박사의 실험에 의하면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차이코프스의 교향곡 <비창>을 들려주었더니 우울증이 더 심해져 절망감을 갖게 되고 심해져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음악은 외면적으로는 힘차고 활발하고 정렬적인 반면 우울하고 감상적인 일면이 있는 것은 그의 정신성의 양극서의 발로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어머니에 대해 지나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어릴 적에 기숙학교에 입학 했을 때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마차에 몸을 던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14살 때 콜레라로 사망한다. 그의 이런 체험은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여성에 대한 사랑을 숙면 적으로 거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우울증과 동생애로 고생하였는데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죄악 시 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음악가를 파멸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으며 본인으로서도 수치와 슬픔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37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안핬고 자신의 10년 연하 학교 후배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차아코프스키가 자신의 구혼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처음엔 거절했으나 결국 결혼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자신이 결혼 한 것을 후회하여 자실하려고 모스코바 강에 몸을 던지나 실패한다. 그들의 결혼은 9주만에 끝난다.
평생을 만나지 못한 후원자 폰 메크 부인
그녀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에 전념하도록 14년간을 경제적인 후원을 했다. 그녀의 조건은 만나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들은 수많은 편지를 왕래하였고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서로가 피하였다.
그의 사인은 전기에 보면 콜레라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는 그의 사인을 강요된 자살로 보고 있다. 그는 당시 권력가였던 훼모르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 이 둘 관계를 알게 된 공작은 황제에게 고소장을 냈고 이 소장은 검찰부총장인 야코비에게 접수 되었는데 그는 차이코프스키와 법대 동창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야코비는 동기생 8명에게 연락하여, 상의하여 명예재판을 비밀리에 열어 차이코프스키가 개인적니 오명을 남기지 않도록 결의 하였다. 법정은 야코비의 집이었으며 그들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으라고 하였고 차이코프스키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개성은 유럽적인 음악어법과 러시아적 감정이 융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민요적인 선율이나 러시아적 정감을 위주로 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하나의 형태 속에 넣기 위하여 고전적 형식을 썼다. 그러나 이 관현악법의 숙달은 그때까지 러시아에 없었던 대규모의 교향적 작품을 가능케 하였다.
차이코프스키 비창
차이코프스키 최후 최대의 걸작인 비창은 서거의 해에 작곡되어 초연 1주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자신도 이 곡을 지적하여 마치 진혼곡과도 흡사하다고 하며 흐느꼈다고 한다.
먼저 아다지오의 무겁고 불길한 서주가 바순과 저현으로 꿈틀거리며 머리를 쳐든다. 고뇌를 강조하는 압도적인 제 1주제, 슬프고 나약한 제2주제의 환상 가득한 아름다움, 그러나 코다 에서는 모든 것을 체념하듯 조용한 발길의 피치카토를 타고 인생의 수수께 기만을 그냥 남기고서....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
드보르자크 (Antonín (Leopold) Dvořak 1841~ 1904, 체코 )
- 그는 보헤미아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 근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는 체코의 서부지역을 말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자유 분망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의 오랜 전통 위에 근대적 음악을 구축한 선구자는 스메타나이고, 이를 세계적인 것으로 입지를 굳힌 사람이 드보르작이다.
- 교향곡<신세계로부터>
드보르작은 1892년 미국에 초빙되어 뉴욕 국민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이국 땅에서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근 보헤미아 출신들이 모여 사는 아이오와주 스필빌에 자주 갔다. 그 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의 민요에 접하게 되었고, 대 평원을 여행하며 큰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신세계로부터>는 이처럼 대자연의 감동, 인디언과 흑인들의 영가, 고향 보헤미아의 민요들이 어우러진 교향곡이다.
- 2악장에 흐르는 잉글리시 호른의 멜로디는 광활한 자연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영혼의 울림과 도 같다. “꿈속의 고향”이라는 노래로 따로 연주되기도 한다.
스메타나 교향곡 <나의 조국> 중 2번 몰다우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3.2~1884.5.12)가 1883년 작곡해서 발표한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은 조국의 자연, 전설 및 역사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체코의 음악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처음에 제1곡 <비셰라드>, 제2곡 <몰다우(Moldau)>, 제3곡 <샤르카>의 3부작으로 완성할 생각으로 1874년 작곡에 착수했으나 작품이 진척되는 동안 조국에 대한 사랑이 더욱 용솟음쳐 마침내 3곡(제4곡 '보헤미아의 숲과 평원에서', 제5곡 '타보르', 제6곡 '블라니크')을 더 추가하여 전6곡의 교향시를 완성했다. 제2곡 Moldau는 여섯 곡의 연작 교향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다.
'블타바'란 프라하시를 흐르는 강이름인데 독일명 '몰다우'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교향시는 1879년에 완성되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헌정 되었다.
몰다우는 체코슬로바키아 남쪽 고원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프라하를 지나 엘바강과 합류하여 도이치로 흘러가는 중요한 강이다.
그의 교향적 작품들은 외형상으로 리스트 교향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민족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사용하여 근대적 작곡 기법으로 민족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을 썼다. 이 교향시 '몰다우'는 너무 빠르지 않은 템포로서 E단조 6/8박자다.
Symphonic Poem "Finlandia"
시벨리우스 - 교향시 "핀란디아"
핀란드는 약소 국가로 13세기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 그 이후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의 핀란드에 대한 압박이 심하게 되자애국적 저항 운동이 불붙게 된 시기에 34세의 청년 시벨리우스는 1899년 애국 찬가인이 작품을 작곡하여 민족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래서 이 곡은 한 때 러시아에 의해 연주가 금지당한 적도 있었다.곡의 중간부의 선율은 가사를 붙여'핀란디아 찬가'라는 합창곡으로 만들어졌고,오늘날 핀란드의 준국가로 애창되고 있다. 곡은 금관에 의한 고난의모티브가 나오고 투쟁의 모티브가 나와 힘차게 고조된 후'핀란디아 찬가'
의 선율이 나오고 다시 투쟁의 모티브,축전의 모티브로 고양되어 당당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고난을 겪는 핀란드 - 투쟁을 결의하는 핀란드 국민 - 투쟁 속에서 자유를 호소하는 핀란드 국민 - 고조된 투쟁속에 승리를 -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핀란드 국민> 을 나타내고 있다.
국민악파의 음악적인 특징의 하나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기악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배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라의 민족적 특색을 예술음악 속에 살리는 것이었다.
F.리스트와 F.F.쇼팽은 주로 국외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보통 국민 악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러시아에서는 글린카가 국민주의적인 음악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으며,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등 소위 5인조가 국민 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꼽힌다. 이 밖에 북유럽에서는 덴마크의 게제,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이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썼다.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곡들은 ‘꼭 들어야하는 음악 2’에 첨부되어 있음)
인상주의 음악.
20세기 현대 미술의 출발점이 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모네(C.Monet, 1840~ 1926)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햇빛 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과 거기에서 받는 순간적인 인상을 묘사했다. 이 같은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인상주의 음악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는데,
그 주역이 바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드뷔시(Achille Claude Debussy)다.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
인상주의 음악이란 회화의 인상주의가 음악에도 적용되어 생긴 음악 양식이다.
처음은 회화에서 사용된 이 말은 드뷔시의 독창과 오케스트라 작품 <봄>(1887)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쓰이고부터 음악 세계에서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환상적이며 빛이라든가 바람과 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자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의 순간적 인상을 음빛깔에 정착시키려 함을 말하며, 따라서 그 때까지의 음악처럼 다이내믹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형식 대신, 순간 순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매혹적인 울림으로써 성립되는 미를 추구하는 음악이다.
드뷔시는 상징파의 시인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를 토대로 한 전주곡(1892-1894)으로 바그너적 음악과 결별하고 인상주의 수법을 확립시켰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뚜렷한 윤곽 없이 경계선이 희미한,
그러면서도 복잡한 색채로 대표되는 인상주의 회화와 닮아 있다.
먼저 조성을 보면 무슨 조인지, 장조인지 단조인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리듬 역시 불규칙적이고, 빠르기도 유동적이며 형식마저 분명하지 않다.
■ 인상파 음악의 특징
① 모네, 드가, 르느와르 등의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음
② 사물에서 느낀 순간적인 생각을 강하게 표현
③ 화음 밖의 음과 불협화음을 자주 사용
④ 과감한 화성과 음계의 변화를 시도(5음 음계, 온음 음계)
■ 대표적 작곡가와 작품
① 드뷔시(C.A.Debussy, 1862~1918)
프랑스 태생, 인상파 음악을 열음
주요작품: 피아노곡<달빛><바다>, 관현악곡<목신의 오후>
② 라벨(M.J.Ravel, 1875~1937)
프랑스 태생
주요작품: 피아노 독주곡<물의유희>, 관현악곡<볼레로>, 피아노 협주곡, 가곡
그 외에도 관현악 작품《녹턴집, Nocturnes》《영상 Imagine》《바다 La Mer》가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품들이고, 팔랴(M, Falla)의 《스페인 정원에서의 밤들》과 레스피기(O. Respighi)의 《로마의 소나무》등이 있다.
현대음악
- 재즈의 탄생과 클래식음악에 미친 영향
20세기 초 미국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 장르는 바로 재즈와 뮤지컬이었다.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즈는 재즈의 고향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20세기에 갑자기 재즈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노예들에게서부터 이다.
이역만리에 끌려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흑인들은 고향을 떠올리며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흑인들의 노래와 교회의 찬미가(Hymn)가 결합돼 만들어진 것이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이다. 흑인들이 생활의 애환을 노래한 것이 블루스(Blues)다. 흑인 영가와 블루스를 바탕으로 백인들이 연주하던 관악 연주(Brass Band), 예를 들어 프랑스 군악대의 편성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재즈다. 재즈는 뉴올리언스에서 증기선과 함께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미국 중심부로 전파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전쟁 중에 불려졌고, 라디오가 발명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900년대 탄생해 ‘딕실랜드 재즈’라 불리던 뉴올리언스 재즈는 1930년대 스윙 재즈의 붐으로 이어졌다. 베니 굿맨과 글렌 밀러의 재즈 오케스트라들이 화려한 춤곡을 선보였다. 1940년대부터 시작된 비밥(Bebop)은 모던 재즈의 원점이 되었고 트럼펫이나 색소폰에 피아노, 리듬섹션(드럼, 베이스)이 추가 되었다. 1950년대 이후 하드밥과 그 이후 프리재즈, 퓨전재즈 등으로 재즈라는 장르는 점점 커져 갔다.
재즈는 20세기 클래식 음악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는데 드보르자크, 거슈인, 스트라빈스키 등은 재즈와 클래식이 융화된 작품을 남겼다.
재즈는 탄생하자마자 클래식에 영향을 주었고, 나중에는 그 영향을 받았다. 드보르자크는 일찍이 흑인영가에 매료됐었고 드뷔시나 라벨, 스트라빈스키는 자신들의 작품에 재즈의 이디엄을 사용하거나 재즈라는 이름을 썼다. 라벨의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 G장조]나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 [에보니 협주곡] 등이 그러했다.
조지 거슈윈(1898~1937)
재즈와 클래식이 완전히 융화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조지 거슈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4년 거슈윈이 발표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인 블루]는 재즈 스타일과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절묘하게 아우르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는 등장인물 전원이 흑인인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었다. 그 뒤 미국에서는 뮤지컬의 걸작들이 쏟아지게 된다. 특히 1957년 뉴욕필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12음 음악의 탄생 – 아르놀트 쇤베르크
1옥타브 12개의 음을 모두 똑같은 가치를 가지는 음으로 다루는 음악 기법. 이 12음 기법에 의해 작곡된 음악을 12음 음악이라 한다. 12음 기법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거론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반음계의 움직임은 베토벤 시대로부터 작곡 기법의 모토였던 “하나의 곡은 하나의 조성을 기본으로 구성되고 전개된다”는 불문율을 뒤흔든다. 드뷔시,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19세기 말에 활약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은 곡의 조성을 애매하게 해서 조성을 알 듯 모를 듯하는 한계선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음악을 듣는 사람은 조성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조성에 좌우되지 않는 음악을 무조음악이라고도 부른다.
1921년 쇤베르크는 친구 요제프 루퍼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12음 기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쇤베르크는 루퍼에게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하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여기엔 과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쇤베르크의 12음 음악은 두 제자 안톤 폰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에게 계승되었고, 음렬음악(뮈지크 세리엘)의 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독일에서 공부한 세계적인 우리 작곡가 윤이상과 박영희의 작곡세계도 음렬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전자음악과 구체음악
1877년 에디슨의 목소리로 부르는 ‘메리는 어린 양을 가졌네Mary had a little Lamb’이 원통형 축음기에 녹음됐다. 이 최초의 녹음 이후 원통식보다는 원반형 음반이 일반화되었고 1900년경 78회전으로 재생하는 30cm판 레코드의 한쪽 면에 3분의 음악이 녹음되었는데 이를 SP라 한다. 이후 녹음의 양과 음질의 진보는 계속되었고 1948년 미국 컬럼비아사에서 최초의 LP인 밀스타인 연주, 발터 지휘 뉴욕 필의 멘델스존 협주곡 음반이 발매되었다. 자기 테이프를 이용한 테이프 리코더도 실용화, 대중화되었다.
전기 기술의 발전은 전자음악을 낳았다. 이 분야의 거장으로 칼하인츠 슈톡하우젠(1928~2007)을 빼놓을 수 없다. 쾰른의 서독일 방송국 전자음악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면서 수많은 전자음악을 만들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제자였던 그는 음악의 요소로 음고와 음색, 지속, 강도뿐 아니라 음의 방위성이나 공간성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성학과 음향물리학, 정보이론 등을 연구하여 작곡에 응용했다.
이 무렵 ‘구체음악’(Concrete music)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프랑스 국영방송국의 기사였던 피에르 셰페르가 창시한 이 음악은 새소리나 증기기관차 엔진 소리, 소음이나 악기 등 구체적인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한 다음 골라서 음향기기를 이용해서 음을 변형한다든지 짜맞춰서 작곡한 음악이다. 이제는 신시사이저의 발달로 ‘샘플링’을 통해 모든 소음과 일상의 소리들에 음계를 부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20세기 음악의 지평을 넓힌 사례로 간주되었다. [철도 연습곡], [소년의 노래] 등이 그의 작품이며 에드가 바레즈나 크세나키스 등 작곡가들이 이 방식을 통해 작곡하기도 했다. 구체음악은 음렬음악과 전자음악 모두 관련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음악 레코딩 중인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음렬음악도 발전을 계속했다. 20세기 초까지 클래식 음악의 구성 요소는 선율과 화성, 리듬을 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음렬음악에서는 이보다는 음의 높이와 길이, 세기와 음색 등 추상적인 척도를 중시했다. 여기에 12음 기법의 음렬 열거 방법을 응용해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전음렬주의 혹은 총렬주의를 탄생시킨 메시앙의 ‘음가와 강약의 모드’ 등이 대표작이다. 또 신시사이저의 발달은 20세기 중반 이후 월터 카를로스의 [Switched on Bach](1968) 앨범을 시작으로 대중들과 일반 음악팬들에게 전자음악의 존재감을 알렸다.
- 우연성의 음악 – 존 케이지의 실험
1952년 뉴욕의 우드스톡 공연장에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가 등장했다. 그가 초연한 작품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그러나 피아노에 앉아 뚜껑을 연 튜더는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 작품의 연주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시계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뚜껑을 닫고 일어나서 인사만 하고 들어갔다. 관객들은 격노했다.
아무튼 존 케이지의 의도는 제대로 들어맞았다. 연주자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4분 33초동안 우연히 들려오는 소리, 객석의 기침, 부스럭대는 소리,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 등 모든 소리들이 이 작품을 구성한다는 것이 케이지의 생각이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소리가 완벽히 차단됐다는 방향실을 방문한 뒤 그곳에서도 소리를 듣고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 이 작품의 작곡 동기라고 알려져있다. 불교와 선에도 관심을 갖고 동양사상에 매료된 케이지의 수법을 ‘젠(Zen, 禪) 오퍼레이션’이라고도 한다.
케이지는 우연성이나 불확실성 음악을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도형악보’로 도안된 악보도 그 기법 중 하나다. 1959년 뉴욕에서 초연된 케이지의 [폰타나 믹스]의 악보는 뒤엉킨 움직임이 있는, 곡선이 그려진 한 장의 종이와 세 장의 투명 필름으로 되어 있다. 세 장의 투명 필름에는 각각 검은 점, 격자 모양, 하나의 직선이 그려져 있었다. 연주자는 네 장을 겹쳐보면서 연주를 하는데, 도형으로 된 악보는 연주자에게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며, 필름을 겹치게 하는 방법이나 악보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연주자의 자유이다. 연주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음악이 되는 것이다. ‘또뽑기’ 같은 악보인 셈이다. 도형 악보를 위해서 디자이너와 공동 작업을 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케이지는 또한 1930년대 후반 현과 현 사이에 볼트나 지우개 등을 끼워서 소리를 변조시킨 ‘조작된 피아노(prepared piano)’를 고안해 이 악기를 위한 작품들을 썼다.
- 미니멀리즘과 현대인의 안식을 위한 음악
1960년대 이후부터 대두된 ‘미니멀리즘 음악’은 말 그대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 기본을 중시하고 기교와 장식을 지양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은 반복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했다. 스티브 라이히나 테리 라일리, 필립 글래스 등의 작품들로 만나볼 수 있다. 이들 미니멀리즘은 대중음악의 테크노 장르로 이어졌다. 현대음악이 비인간적이고 디지털화된 음악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폴란드의 헨릭 구레츠키, 미국의 알란 호바네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는 자연과 영성을 중요시한 작품세계로 황폐화되고 복잡해진 20세기와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단비가 되어 주었다. 아시아에서도 현대음악은 현재진행형이다. 죄르지 리게티의 제자인 우리나라 작곡가 진은숙, 에드가 바레즈의 제자인 중국의 탄 둔 등이 왕성한 창작으로 기존에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동양 작곡가였던 일본의 다케미츠 도루의 입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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