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영화의 배경&특징 ###
-일본 식민지 시대
74년 일본은 일본인이 살해된 것을 이유로 타이완에 출병하여 이것이 94∼95년 청·일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결과 타이완은 일본에 할양되어 51년간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에 앞서 1884년 프랑스함대가 펑후를 점령하여 이듬해 청·프전쟁이 일어났고, 타이완성으로 개칭되었다. 95년 일본은 초대 대만총독에 하바야마 모토기[樺山資紀] 해군대장을 임명하고 이듬해 군정(軍政)을 폐지하였으며 타이완총독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제63호>를 공포하였다. 97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 따라 모든 타이완국민은 2년 내에 중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타이완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정치적 차별정책으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1895년 타이완민주국 건설, 1920년 타이완의회 설치 청원운동 등의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45년 7월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타이완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2.28 사건
항일 전쟁이 승리한 후 미제국주의의 대만에 대한 침략과 장개석반동정부의 파쇼 통치는 대만인민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그들은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참을 수 없어 1947년2월28일 대규모의 시위를 단행하게 된다.
1947년2월 27일 대만 국민당 전매국의 무장인원이 타이베이시 연평북로에서 담배를 파는 여성을 구타하였고, 불평을 보이던 시민을 총격으로 살해하였다. 이는 전 대북시 인민들의 반항물결을 일으켰고, 시민들은 경찰국에 모여들어 흉수를 엄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2월28일 타이베이시는 파업과 시위를 단행, 국민당 전매국 타이베이시 공사를 부시고 창고를 불태웠다. 국민당 대만성 행정장관공서에 흉수를 엄벌할 것과 배상 및 전매국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3명이 살해되고 3명이 부상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경찰서에 쳐들어가 총을 빼앗고 방송국을 점령하고 전성 인민들에게 정의투쟁을 지원하고 장개석의 독재정권을 뒤엎을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 기륭, 고웅 고산족동포들을 망라한 인민 군중들이 분분히 호응. 적의 무기를 빼앗아 국민당 경찰국을 점령하고 무기창고, 비행장과 군영을 습격하게 된다. 며칠사이 국민당 대만정권은 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황망 실색한 국민당 당국은 3월8일 미국군함과 비행기의 엄호 하에 미군 2개 사단의 장비군대를 대만에 이동시켜 기륭에 등륙, 봉기인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피살인이 3만에 달하였고, 결과적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
대륙에서 이주해온 한민족(漢民族)은 조기 이주자인 타이완인(本省人)과 1949년 전후에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외성인(外省人)으로 나뉜다.
@대만 영화의 시기 구분
- 일본 식민지 시대 : 무협&멜로 영화
- 장개석의 선전영화▶반공 이데올로기
1950년대 : 무협 & 멜로 영화
1960년대 : 상업 오락영화
- 1970년대 : 헐리우드와 홍콩 영화에 밀림
- 1980년대 : 대만 뉴웨이브
대만의 일본 식민지 시대에 그렇다할 영화가 제작되지 못하였다. 일본의 문화 정책으로 인해 자유로운 문화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비교적 단순한 무협 영화나, 멜로 영화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1950년대에는 장개석 정부가 대만에 진입하면서, 공산당을 반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출하기 위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장개석은 영화 제작에 있어서 많은 검열을 하였고, 사회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 영화들은 제작할 수 없게 하였다. 장개석 정부는 오로지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영화만을 제작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영화감독들은 비교적 제약이 없는 무협 영화나, 멜로 영화를 만들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장개석 정부는 영화를 통해 무수한 자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부의 이익을 위해서 상업적인 오락영화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대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와 홍콩의 상업 영화가 주축을 이루며, 대만 영화는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하는 헐리우드 영화와 세계 시장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둔 홍콩 영화의 흥행에 밀려 대만 영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이러한 대만 영화 침체기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려는 노력이 각계에서 보여 졌고, 그에 따라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나타난 ‘대만의 뉴웨이브(新浪潮)’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대만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는 기존의 명절 대목을 위한 상업적인 영화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예술 영화가 거대한 줄기를 이루면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21세기에 활발히 활동하는 감독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대만 영화의 부흥을 주도하였던 사람들로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타이완 뉴웨이브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하는 감독들로 양덕창을 비롯하여 후효현, 천쿤허우, 쟌홍즈, 완련, 장이, 쟈오슝빙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처럼 거대한 군단을 형성하는 젊은 감독들이 제작한 예술영화는 양질 양면으로 타이완 뉴웨이브의 컨텐츠를 대단히 풍성하게 증강시켜 놓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국제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감독은 단연 후효현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타이완 뉴웨이브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후효현 侯孝賢 (1947.4.8~)
중국 본토(광동)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 해에 가족 모두가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고
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병역을 마치고, 1969년 국립예술전문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배
우로서의 꿈을 키웠다. 학교에 다니면서 리싱[李行] 감독 밑에서 촬영소의 일을 돕기도
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뒤 배우로의 길이 여의치 않자 전자계산기 세일즈맨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였다. 이때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여 1980년에 직접 시나리오를 쓴《귀여
운 여인》으로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 후효현 대표작 <<대만 현대사 3부작>>
1989년에 <<비정성시>>가 타이완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후효현은 본격적으로 향토와 유년의 기억 위주의 주제에서 시각을 역사로 돌리
기 시작한다. 1993년에 제작된 <<희몽인생>>과 1995년에 제작된 <<호남호녀>>가 바로
그 결과물인데 이 세 작품은 이른바 ‘타이완 3부곡’이라는 이름으로 병칭된다. 이러한 일
련의 영화 제작은 단순히 타이완의 영화현실을 반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효현 개인
의 역사와 그가 속한 집단의 역사를 같은 섬 위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삶에 용해된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역사를 박제화하지 않고 생생한 삶의 배경이자 사회를 인식하는 원리로 승화
시키고 있다.
① 비정성시(悲情城市: 1989년) : 1989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타이완 3부곡’의 첫 번째 작품으로, 역사의 형식으로 타이완의 국가 속성의 문제를 언급하는 동시에 현재 타이완 국민이 느끼는 국가 인정이 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40년 동안 타이완의 관방 역사서술에서 소실되어 버린 타이완 역사의 기억을 제공하는 동시에 관중들에게 ‘2.28 사건’을 대표로 하는 타이완의 ‘조국회귀’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충돌을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삶에 용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정성시는 계엄 해제 이후 처음으로‘2.28 사건’을 대중매체 수단으로 다루면서 민중의 기억을 되살린 영화로서 역사의 왜곡과 오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재현’을 제공하고 있다. ‘2.28 사건’을 전후로 하여 펼쳐지는 한 가족 3대의 일상생활 경험을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전개로 재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상 당시 대만인들이 자신들의 집체를 위해 국민당 정부를 대표로 하는 중국 정권으로부터 받아야 했던 잔혹한 위협과 학살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② 희몽인생(戱夢人生: 1993년) : 1993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상
‘타이완 3부곡’의 두 번째 작품으로 대만 포대희(布袋戱)의 대가인 리티엔루(李天祿)
의 자전을 다룬 영화이다. <<비정성시>>가 일본의 통치가 끝난 이후의 대만인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대만의 과거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 일제시대 50년의 생활상황
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만에서 계엄이 해제된 이후로 일본 통치 시기 대만의 생활
상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했지만 국민당 통치시기에는 이 시기의 역사에 관해서는
언급된 사료가 매우 적었다. 후효현은 대만의 과거에 깊이 매장되어 있는 복잡한 감정과 기
억들을 되살려야만 타이완이 어떻게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완전히 이해하
고 국토 대만에 대한 완전한 귀속감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지나간 일제시대가 현재
대만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삶의 태도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③ 호남호녀(好男好女:1995년)
‘타이완 3부곡’의 마지막 작품. 1947년 ‘2.28 사건’으로 감옥에 잡혀 들어갔던 한 정치범이 80년대 초 계엄이 해제되면서 갑자기 석방되어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국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교류의 국가라는 낯선 상황에 직면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구상을 약간 변경하여 타이완사의 현재와 과거를 통해 역사의 본질에 대해 질의를 던지는 영화이다.
2. 양덕창 楊德昌 (1947.11.6~)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대만으로 이주했다. 대만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1974년 USC영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고 시애틀에서 컴퓨터 관련업에 종사하다가 1981년 대만으로 돌아와 영화감독으로 전업했다. TV드라마 한 편을 연출한 후 1982년에 대만 뉴웨이브 운동의 발단이 된 옴니버스영화 《세월의 이야기》의 제2화 《기대》를 연출해 주목을 끌면서 대만영화를 가장 먼저 세계에 소개하였다. 이 시기에 후효현을 알게 되었으며, 41명의 젊은 영화인과 함께 ‘새로운 대만영화 선언’을 하였다. 그는 후효현과 함께 대만의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두 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 양덕창 대표작 <<타이베이 3부작>>
① 타이베이 이야기(靑梅竹馬:1985) :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② 공포분자(恐怖汾子:1986) : 로카르노영화제 은표범상 수상
③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 칸영화제에 초대작
⇒ 이 일련의 영화는, 불안과 이별(타이베이 이야기), 무료함과 장난질(공포분자), 원자화된 삶과 살인(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등 각 모티브와 결말은 다르지만 타이베이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정체성의 불안과 개인의 심리적 붕괴를 예민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3. 채명량 蔡明亮 (1957.10.27~)
말레이시아의 쿠친(Kuching)에서 태어난 차이밍량은 후효현(候孝賢) 이후 대만영화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대만 현대 사회의 소외와 단절감을 절제된 대사와 영상으로 표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거부하며 특히 영화의 낭만성을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대만 현대사회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밍량은 영화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1977년 대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대만 문화대학(文化大學)에서 영화와 연극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10년 동안 TV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왕통(王通), 왕샤우디, 진창페이 등과 작업하였다.
*채명량 대표작
①애정만세(愛情萬歲:1994) :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 수상
- 비어있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도시의 거리, 납골당 등 90년대 대만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을 제시하였다.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침묵과 팔리기를 기다리는 빈 아파트의 공간은 그들 소외된 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이다.
②하류 (河流:1996) :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
- 한 가족의 분열과 어두운 동성애의 세계를 그렸다. 전작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서 있는 영화이다
③구멍(洞:1997) : 칸영화제 국제 비평가협회상 수상
- 아시아의 2000년대에 관한 영화. 역시 차이밍량 특유의 도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을 다루고 있다.
4. 이안 李安 (1954.10.23~)
1975년에 국제 타이완 예술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78년 일리노아 대학, 뉴욕대학에서 연극영화에 대한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3년 로 타이완 골든 하베스트 최우수작품상(Best Narrative Award)을 수상하였고, 뉴욕대 재학시절 만든 45분짜리 영화 (Chazz Palminteri주연)로 뉴욕대 영화제에서 감독상, 작품상을 탄 경력이 있다. 현재,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인정받고 있는 이안 감독은 오우삼과 함께 헐리우드에서 성공적인 입지를 굳힌 몇 안되는 아시아 감독이다.
*이안 대표작
① 결혼 피로연(1993) :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게이인 대만 청년과 영주권이 필요한 중국인 처녀가 서로 위장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
때문에 미국에 온 부모와 한바탕 벌어지는 소동과 갈등을 그린 드라마.
② 음식남녀(1994) : 94년 칸느영화제 감독주간 오프닝작
유명 호텔의 최고 요리사인(외성인 1세) 주인공과 그의 세 딸과의 세대간의 갈등을 그
린 영화.
③ 와호장룡(2000)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19세기 초(청조 말기)의 혼란한 강호 속에서 대조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 무 사의 사랑과 모험의 무술 오페라. <책상서랍 속의 동화>이후 미국자본과 중국 스탭이 결 합해 만든 두 번째 영화.
### 대만 대표 배우 ###
*남자배우 *여자배우
① 금성무(金城武) ①임청하(林靑霞)
② 임현제(任賢齊) ②오천련(吳倩蓮)
③ 임지령(林志穎) ③서기(舒淇)
⇨ 이들은 대만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점점 그 활동 범위를 넓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 금마장(金馬獎) 영화제 ###
1962년에 첫 회를 시작으로, 2005년인 올해에 제42회를 맞게 된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제 중 하나이다.
### 대만 영화의 현재와 미래 ###
<<대만 영화의 침체기>>
* 제작 상황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만영화는 여러 외국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여서 이후 대만영화산업은 깊은 침체에 빠져들었고 이런 상황은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1993년 이후 대만영화계가 고전하기 시작하면서, 1995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제작사들이 문을 닫는다. 1997년 이후에는 국내시장이 더욱 위축되자 제작자들은 더욱 서둘러 TV채널사업과 극장사업으로 국산영화제작과 배급에 들어간 손해를 보충하려고 하였다. 이때부터 국산영화제작은 거의 사라지고, 극장과 TV와 비디오 사업에만 투자가 이루어졌다. 1999년 10월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만감독협회장 리싱(李行)이 경영하던 대영공사(臺灣電影公司)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기에 이른다.
1990년에 76편에 이르렀던 제작 편수는 1992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여 1999년에는 전체 제작편수가 20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극장에서 정식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은 10편 정도에 머물고 있다. 영화제작사라고 불릴 만한 회사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들은 자금을 구하는데 지쳐가고 있다. 정부 신문국(新聞局 : 우리나라의 공보처에 해당)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이 거의 유일한 영화제작비 출구이지만 이 역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만들어진 영화를 배급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1997년 스크린 쿼터가 전면적으로 완화된 이후 배급업자들은 국산영화를 외면하고 외국영화의 배급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어렵게 개봉되는 국산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도 차갑기 이를 데 없다.
대만 영화의 지자 시사회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언론에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이 개봉되었다. 하더라도 일주일 이내에 간판을 내리기 일쑤이며, 제작사들은 단지 비디오시장에서 값을 더 받기 위해 극장에서 개봉을 하거나 아예 비디오나 CATV로 직행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자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영화계에 산업구조가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제작자금 구하기는 전적으로 감독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일부의 명성 있는 감독들의 경우 프랑스, 일본 등의 외국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다.
* 대만 영화계가 침체하게 된 원인
1> 정부 영화정책 시행의 잘못
첫째, 정부 영화정책 시행의 잘못을 들 수 있다. 특히 보조금정책은 별 실호도 없이 영화제용 영화만을 조장했으며, 외국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 정책으로 국산영화는 설 땅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2> 영화 전문 인력의 부족
둘째, 영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모두 감독만 하려고하여 프로듀서나 제작전문 인력, 기술 인력의 공백이 심각한 지경이다.
3> 배급과 상영 단계의 불합리성
셋째, 배급과 상영 단계의 불합리성을 들 수 있다. 제작자(감독)와 배급업자(극장업자)의 반목도 심하고, 배급사들은 CATV에만 치중하여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4> 관객과 언론의 할리우드에 편중된 식성
넷째, 관객과 언론의 할리우드에 편중된 식성을 들 수 있다. 언론들은 대부분 대만 영화
에는 무관심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에는 홍보물을 그대로 전재할 정도이다. 관객들도
비단 대만 영화 뿐 아니라 중국어로 된 영화는 무조건 안 본다.
5> 스크린 쿼터제 폐지
* 대만 영화의 미래
많은 영화계의 전문가들은 대만의 영화계가 이미 침체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을 맞이하였다고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만 국내외로 활동하고, 명성을 얻고 있는 감독들과 배우들의 노력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세계의 이름난 영화제에서 대만 작품들의 수상은 그 무엇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훌륭한 작품들이 계속하여 탄생하고,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참신한 감독들, 그리고 영화인들이 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 연구하고 노력한다면 대만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후효현 같은 감독들이 신인 감독 발굴을 위해서 공식적으로 아카데미를 건립하고 있다.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인하여 훗날에 대만 영화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