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郞道화랑도에 대한 모든 것
우리는 여러 가지 훌륭한 교육적인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화랑도 교육이다. 우리는 이 화랑도 교육의 전통에 대해서 다른 어느 교육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삼국통일의 힘을 화랑도 교육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지고 도덕생활을 해왔다. 민족의 건국 이념인 弘益人間의 사상은 고대 한민족의 윤리생활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홍익인간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순수한 인간애의 표현이며 나보다는 남을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나 사회의 이익을 중시했던 사상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일찍이 武勇을 좋아하고 忠義를 숭상하는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고유의 전통과 외래사상인 유․불․禪 三敎의 사상이 결합된 화랑도는 五戒과 三異정신으로 연마했으며 이른바 세속오계는 비단 화랑도의 근본정신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신라인의 정신적 지표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화랑도를 민족적 전통사상에서 조명할 때 이는 우리 민족의 평화 애호사상은 물론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반영하고있음을 丹齊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을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가지인 愚策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화랑도가 우리 민족고대사상의 결실이요 원동력이라 할 때 화랑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원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랑도 교육사상은 우리 민족의 强靭하고 투철한 애국정신을 반증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애국정신은 우리 역사의 핵심이 됨은 물론 민족정신의 바탕인 것이다.
화랑도의 교육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은 매우 크다. 민족분단의 어려운 여건에서 국제적으로 비약할 수 있는 期約을 위해서는 화랑도사상이야말로 우리의 용기와 슬기의 본보기요 가치관인 것이다. 즉 화랑도 교육사상에서 본 주체의식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바로 그 주체의식이요 윤리의식은 우리의 본래적인 인간성을 회복해 주기에 충분하며 특히 沒我的이요 信仰的이기까지한 滅私奉公의 정신은 우리의 무한한 발전을 이룩할 힘을 주기에 남음이 있다.
화랑도는 고대사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문적 토대가 되어 왔다. 특히 사상적으로 삼국통일의 역사적 배경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화랑도는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민족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 전통사상이다. 교육적으로는 실천력 있는 생활중심. 행동중심의 교육으로 그 시대 정신을 표출한 원동력이며, 하나의 민족 정신화된 사상으로 새로운 가치덕목이 수립과 교육적 전통의 발굴․계승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사상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의 교육사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함으로써 한국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 우리 청소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자료를 얻고자 하며 일상생활에서의 윤리도덕과 생활철학에 훌륭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자 한다.
또한 고유신앙의 토대 위에 유․불․선 三敎의 사상을 習合하여 훌륭한 우리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화랑도 사상을 민족의 주체성․정통성․민족정기․국적있는 교육으로 전환코자 본 화랑도 교육사상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본 연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와 論理書를 중심으로 하였고 화랑도에 관한 학설을 종합하여 신라인의 투철한 화랑정신과 그 내면적인 문제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 방법에 있어서 먼저 화랑도가 성립하게 된 배경과 두 번째로 화랑도의 사상을 그 배경과 특징을 살펴본 다음 세 번째로 화랑도의 교육사상으로서 교육목적, 교육과정, 교육방법을 살펴봄으로써 화랑도의 교육사적 의의를 파악하고자 했다.
Ⅱ. 화랑도의 성립과 조직
1. 화랑도의 발생 배경
가. 청년단체로서의 화랑도 발생
신라 화랑의 원류는 청년 조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삼한 중에서도 촌락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신라의 보수성으로 국가사회는 점차 親族的이며 分枝的인 사회조직을 基盤으로 발전되면서 촌락공동체의 均衡이 파괴도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라는 6C 초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하면서 대외적으로 팽창을 도모하므로 서 주변의 고구려와 백제와의 무력 衝突을 극복해야만 했고 그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청소년 단체의 군사화와 국가적 육성의 요구가 擡頭된 것이다.
그리하여 청년들의 젊은 기백과 열성을 궐기시켜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欲興邦國」이라는 국가적 목적을 위해 무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인재를 再組織한 것이 곧 화랑제도이다.
그래서 국민을 소년시절부터 나라에 유용한 인물이 되도록 문무양면에서 훈련해야 겠다는 계획아래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화랑제도요 화랑의 윤리이며 화랑운동이었다. 화랑다운 인물의 養成에 힘쓴 것은 그 건국 초부터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랑은 곧 신라의 화랑이니 화랑은 본말 상고 蘚塗祭壇의 무사 곧 그때의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皂衣를 입어 조의선인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화랑의 基源形態를 선도제단의 武士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보아 삼한사회의 청년단체가 신라에서 화랑조직의 초기형태로 발전했다고 보여진다.
또 최남선은 화랑의 기원을 부루교단에 두고 “부루는 상고 조선에 고유한 신앙인 태양숭배 곧 「밝은 뉘」(광명세계)가 변한 말이요 이 부루를 한자로 적을 때 風流라고 이름한 데까지 변하였다”고 하는 등 그 연원을 원시적인 형태까지 파급시켜 보기도 하였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예전부터 청소년들의 민간단체로 전래되어 오던 것을 진흥왕이 자신의 정복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청소년 전사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믿어지나 그 년대와 숫자가 확실치 못한 것이 안타깝다.
나. 산신신앙과 화랑도
삼한사회나 초기 신라사회의 성격이나 사회구조상 청년조직은 씨족이나 지연집단보다는 집단형성의 기반이 넓었고 이러한 특정한 씨족이나 촌락의 테두리를 넘어 종합코저하는 속성을 지녔다. 청년들이 이러한 조직에 종합하게된 요소는 어떤 특정한 신에 대한 공동의 숭배나 또는 어떤 의식의 공동행동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술적 종교적 행사가 후대의 청년조직인 화랑과 접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山岳祈禱 산신숭배는 당시 신라사회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화랑도와 접합되었음을 말해 준다. 신채호 선생이 화랑을 정의하여 선도제단의 무사라 한 것도 화랑도가 무격신앙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화랑제도를 創造함에 여자를 단체의 대의로 삼은 것은 화랑도가 종교적 색채가 짙은데다 샤머니즘적인 화랑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靈을 接觸하는데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화를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산신숭배는 그 자체가 종교적, 주술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부락이나 구가의 수호신이 대개 산악을 본거지로 삼고 있다는데서 생겨진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신라 화랑의 산악을 찾아 순행했던 것도 산중의 동굴에서 영매자인 샤만을 통해 초인간적인 영력을 몸에 익히거나 혹은 샤만을 통해 신앙의 意思를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 이는 샤만을 통해 人格轉換과 自己變革을 꾀한 것으로 보아 화랑의 인격형성이 무격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청년조직에서 그 구심력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무격적인 산신숭배사상이어서 이 신앙과 이에 따르는 의식의 수행은 청년조직의 구성원들에게 一切感을 갖게 하였고 지역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기반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화랑들이 순행한 대의적인 산악이 바로 금강산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不成文化論에서 금강산의신산라 화랑에 의해 국가적 巡禮가 행해진 이유를 설명하여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운조도 오르지 금강산신의 의사여하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希臘의 올림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신탁과 예언이 산에 의하여 계시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화랑제도 이전의 집단내부에서 구심력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巫祝적인 산신숭배사상이었다. 이처럼 청년조직은 基礎집단인 合致집단의 성격을 띄었고 나아가 그 신앙과 禮儀는 청년조직을 지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기반을 제공하였다고 생각한다.
다. 彌勒信仰과 花郞徒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미륵이 화랑의 신앙대상이었고 그 집단의 團員들은 그들 首領인 화랑의 모습을 彌勒半跏思惟像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륵이란 도솔천에서 하생하여 장래 석가불의 뒤를 이어 다시 인간세계에 나타난 龍華樹 아래서 정각을 이룩하여 삼회의 설법으로 一切 인천을 보도한다는 보살로서 하생을 祈願하는 뜻에서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화랑과도 결합하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권3) 미륵선화 미시랑조에서 “ 진지왕 때에 흥륜사에 진자란 중이 있었다. 그는 항상 당주 미륵상 앞에 나아가 發願誓言하였다.” 바라옵건데 우리 大聖이여 화랑의 化身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옵소서 제가 늘 친근하게 기원하는 정이 나날이 두터워졌다. 어느날 밤 꿈에 한 중이 말하였다.“네가 態川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으리라………하여 佛道와 화랑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미륵의 화랑화작에서 彌勒仙花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미륵상이 화랑도의 수호신처럼 숭배되고 있으며 나아가 미륵존이 어린 동자의 모습으로 출현한다는 신라고대의 민간신앙과 결부시킬 수 있다. 또한 화랑의 지니는 종교적인 면이 미륵신앙과 결합하기에 알맞은 것이었고 이에 따라 화랑의 원류인 청년조직이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서 화랑을 미륵의 화생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화랑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정신적 이상과 종교적 신앙심으로 分斷시키지 않고 동시에 회통시키는 것으로 국민윤리의 참뜻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2. 화랑도의 사회적 기능
화랑은 제도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당시의 화랑도가 제도화되는 신라 중 고시대는 대내외적으로 국가체제의 확립기라 할 수 있고 시대적 성격에서도 신라사회가 점차 카스트제적인 골품사회로 확대 강화하는 이행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화랑도가 수행한 정치사회적 기능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사회적 기능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기본적 기능과 부수적인 기능으로 나누게 된다. 이 기본적 기능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於是大王下令 廢原花累年 王又念興邦國 須先風月道〉라는 기록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진흥왕은 국가의 융성을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風月道」를 국민정신으로 크게 진작시켜야 한다고 확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랑제도의 기본적인 목적이 국가사회 융성을 가져오기 위하여 전통적인 풍월도를 크게 선양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풍월도는 열전의 기록에서 화랑도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풍월도는 화랑도의 본래적인 명칭이며 이 내용이야말로 화랑도의 본질과 중요성을 밝혀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랑제도가 국가사회를 크게 융성시킬 바탕이 될 풍월도 사상을 고취시키는 기본적인 기능인 것이다.
다음에는 국가사회의 발전을 고취시킬 수 있는 구체적 기능이 몇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먼저 교육단체로서의 기능과 인물 추천의 기능과 무사단체로서의 기능등 세가지로 들 수 있다. 교육단체기능으로서 보면 신라 화랑은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길러 선악의 價値判斷을 구별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즉 교육의 사명이 인격양성과 민중문화에 있다면 화랑제도에 의한 청소년의 교육은 훌륭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신라 고유사상에 기반하여 외래적인 유불 도교의 사상을 習取하여 세속오계와 삼미의 덕을 수양의 指計로 하여 국가에 보국충사할 수 있는 文武兼備의 인재를 양성하고 또한 우수한인재를 選拔하여 官僚로 천거하는 신라 고유의 특수한 교육관계이다.
따라서 화랑도 교육은 단체생활 과정에서 행위를 修鍊하는 인간교육을 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 봉사하는 忠臣精誠의 기틀을 마련하여 뜨거운 애국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 함양과 양심의 연마에 주력하는 신라정신을 기르는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인물 양성을 들 수 있다. 신라 화랑의 집단성원은 삼국사기(권4) 진흥왕 본기의 기사에 의하면 원화 혹은 화랑을 제정한 목적에 대하여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華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因此知其人邪正 택기선자 薦之於朝” 라 하고 있다. 즉 화랑 제도의 당초 목적이 인재의 발견 및 그 조정에의 추천에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고시대 초기는 관제상 혹은 군제상 법제화의 경향이 현저한 시대였으므로 이에 소요되는 많은 율령관인과 무관을 획들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화랑도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교육체계로서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는 조직체로 제도화되었다고 推測된다. 또한 최남선씨가 화랑도를 인물 연성 기관으로 보면서 이를 一種 考選法으로 취급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사단으로서의 화랑도를 강조하는 立場인 이기백씨가 이를 고구려에 있어서의 태학이나 경당과 마찬가지로 교육적 기능을 갖는 기관으로 본 것도 역시 그러하다. 화랑도의 무사도를 강조하는 鮎見房之進氏가 화랑 제정의 당초 목적을 인물양성과 그 발견에 있다고 본 것도 옳다고 생각된다. 이 중견 인물의 양성은 사회의 전통과 規範의 전수를 통해서 였다. 따라서 화랑도의 戒銘인 세속오계는 무사를 겸비할 수 있는 국가의 유익한 인물로 길러 내는데 적합하게 창안된 것이라 하겠다.
신라에서 행해진 인재등용 방법은 첫째 화랑도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선택했다. 둘째 궁전에 의해 인재를 뽑았다. 이처럼 인재를 위해서는 계급과 문호를 개방한 인물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화랑도는 신분간의 갈등을 완화하는데 이바지 하였고 삼국 투쟁기에 신라의 지도적 인물로 양성하는 청소년 단체로서 정치 군사적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새로운 轉機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무사단체적 기능 즉 군사단체적 기능은 애국애족을 근본 사명으로 하는 화랑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랑들은 어디든 좋은 장소를 찾아 단체훈련과 개인적 연마에 힘쓰고 전시에는 언제나 앞장서서 身命을 받쳐 국가사회를 保衛하는데 역할을 서슴치 않았다.
한편 신라의 화랑도는 명예로운 신라무사로서의 約束을 금석같이 하였고 친우와의 신의를 죽음을 가리지 않고 지켰으며 권력이나 부귀영화에 구애없이 정의를 위해서는 물부을 가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결심한 바를 실행하는 굳은 신의의 인간으로 인격을 연마해갔다. 그리하여 신라사회는 신의에 뿌리 밝은 명랑한 사회가 되는데 기여했고 낭도간에 상부상조하는 순수한 우정관계가 이루어졌으며 전시에는 무사로서 도가 전우미담이 되었다.
3. 화랑도의 조직과 훈련
가. 조직
화랑제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기관적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고 촌락공동체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의 도입을 통해서 결합된 이종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고 만든 조직이었다.
화랑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고 정신수양을 기르는 한편 우예를 연마하여 덕생을 쌓고, 심신을 수련하는 단체였다. 또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圖謀코자 주어진 자연적 조건과 재래의 토속적 민족문화를 기반으로 민족정신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무력강화와 인재양성의 두 가지 목적으로 세워 신라 국민으로 하여금 청소년시대부터 교육훈련을 시키고자 산발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청소년의 수양단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화시킨 것이 화랑제도이다.
이상과 같이 목적으로 제정된 화랑도의 조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화랑도는 일대에 몇 개의 화랑집단으로 나뉘어 있고 이를 중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소위 화주였다고 추측된다. 일상인이 받드는 화랑과 조정에서 받드는 화주를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국선은 화랑의 상수 화랑인 것을 알 수 있다. 일대에 속하는 화랑집단의 숫자는 적어도 七個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앙조정에는 화주 국선이 있고 그 밑에 소수의 화랑이 있어 낭도를 거느렸음을 알 수 있다. 즉 화랑은 郎將勇卒이 되고 낭도는 정 건동이 기본군인인 일반 무관이나 병졸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妥當할 것이다. 또한 화랑의 선출에 있어서도 국선화랑에 해당하는 인물이 하나뿐일 경우는 한 사람을 내세우고 둘 이상인 경우는 그 수대로 국선에 推戴하였으므로 화랑도의 조직 원칙은 민주적이었다 할 수 있다. 한편 국선아래 3~4명 또는 7~8명의 화랑과 수백 수천의 낭도로서 편성되었다. 각 문호에는 승려낭도 1인이었고 화랑 1인에 따르는 무리는 대개 칠백 내지 팔백명에서 일천여명이었다.
한편 화랑단체의 중심 인물인 화랑 개인에 대한 사회적 우대와 기대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화랑이 될 수 있는 자격의 인물 본위였음이 신라 국기의〈擇貴人子弟之美者〉나 또 〈選良家男子有德行者〉에 잘 기록되어 있다. 즉 자격으로는 ① 신분이 높은 가문의 출신이고 ②미남형이어야 하며 ③ 덕행이 있는 자로 한정하고 있다 등은 화랑제도가 창설 초기에는 美貌娘子인 원화라던가 화랑을 인물과 자질을 표준으로 하여 인재양성을 한 기본적 제한이라 하겠다. 따라서 화랑들은 그의 인신 사교성 등 인격의 힘이라 혹은 우아한 용모 등에 의해 낭도들의 환심을 얻고 있는 존재였다.
나. 훈련과 기풍
화랑도의 생활양식이나 훈련은 집단적 공동생할을 통해 지식보다는 실제적인 활동을 종합적으로 학습하여 사회적,정서적, 신체적, 군사적인 훈련에 중점을 두고 현장에 직접 나가 실지와 경험을 체득하는 실습중심의 훈련 방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또한 낭도들은 생활과정을 통해 도의훈련과 군사적 기능을 습득하므로서 각자의 인격을 수양하는데 힘썼다고 본다. 본래 화랑도의 훈련목적은 삼국사기 전 4권 신라본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좌충신을 양성하는 治人교육으로서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인망있는 정치인을 양성함에 두고
② 낭장과 용사를 기르는 군사교육적 목적 즉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국방 인재양성과
③ 孝悌충성 용감 신의 도덕적 인강형성이 교육 목적이었다.
이를 위하여 화랑도는 산천과 대자연을 순예하면서 훈련하므로서 자연과 접해 호연한 인간성을 추구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금강산 地異山 방면에 유오하여 후대에 그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금강산 부근의 岩壁에 「永郎徒南石行」이라는 글자는 금강산에서 낭도들의 훈련하였다는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김종직의 기록에 의하면 지이산에도 영낭첩이 영낭의 이름에 붙여진 것이라 하였던 점으로 보아 화랑들이 명산대천인 금강산과 지이산을 통해 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낭도들은 산속에 도장을 설치하여 무예와 정신면의 훈련과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곳곳의 지리와 인정을 몸으로 익히면서 애국심을 체질화하면서 국가정신을 기승하기 위해 전적지나 고적지 등을 돌면서 훈련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훈련은 엄격한 규율과 질서 아래 일정한 기간내에 훈련과 학업을 마치게 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천전리 서석의 명문 가운데 年文月二日 永郎成業이라 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또한 이기동씨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화랑과 낭도들의 훈련을 마치려면 3년 정도의 가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라시대는 통상 삼년을 하나의 약속기간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김유언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18세 때 화랑으로서의 삼년간 년한을 마쳤고 斯多含 官昌 等 화랑들도 대개 15~16세에 화랑으로 활동하였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화랑들의 훈련으로는 주로 도덕교육인 세속오계와 삼미를 生活信條로 하여 훈련하므로서 협동심과 봉사심을 양성하여 서로 相扶相助하는 기풍을 길렀고 군사적인 훈련으로 활쏘기, 칼쓰기, 말타기, 달리기, 뜀뛰기, 헤엄치기, 산타기, 짐지기, 씨름 , 팔매질 등 각종 기예를 조직적으로 무술훈련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가무, 음악, 시가 등을 즐겨 정서적 涵養에 힘썼고 古蹟地 전적지를 돌면서 浩然之氣와 애향 애국심을 기르므로서 국토 사랑의 뜨거운 애국심을 기리는 한편 도의 함양과 심신 연마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를 숭배하여 마음을 안정케 했으며 體育種目으로 유도, 跆拳道, 씨름을 통해 신체를 鍛鍊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신라의 화랑제도가 가지는 교육적 의미는 가정교육에 있어서 엄격한 생활과 교육이 후세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한 성과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Ⅲ . 화랑도의 사상
1. 사상적 배경
가. 佛敎思想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 다. 화랑도의 구성원중에 승려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승려가 郞徒였던 사람은 惠宿, 轉密, 月明, 節敎 등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 승려는 화랑의 무리속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즉 月明師, 範敎師 安常의 기사 내용에 의하면 승려 낭도는 일반 낭도와는 달리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뛰어나 다른 낭도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또한 삼국유사의 彌勒仙花條를 통해서 沙門, 眞慈가 훌륭한 화랑을 만나도록 미륵에게 간곡히 요청한 것이다. “大聖께서 화랑이 되셔서 와 주신다면 常親近粹容하고 奉以周族하겠다”고 한 점은 眞慈 는 沙門이면서 낭도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랑도 안에서 승려들은 교훈지도나 직능 외 呪歌를 짓는 등 종교적 주술 적인 면에서 활약하면서 지적 정신적 지도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상당한 신분층으로 믿어진다 즉 화랑은 귀족자 제로서의 귀족세력의 상징적 존재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귀족의 신분인 화랑과 불교의 결합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최초의 불교는 신앙 면에서도 왕권과 귀족세력의 조화 위에 성장했던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륵신앙이 彌勒上生經이 아닌 미륵하생경에 의한 신앙이며 彌勒菩薩은 신라에 화랑으로 탄생했다는 믿음과 화랑으로서의 竹旨 郞이나 김유신의 경우를 비롯한 미륵선화의 說話는 불교와 화랑도와의 관계를 잘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승려는 신선적 존재이며 정신세계에 공헌하였고 당시의 승려낭도는 지금 의 군승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화랑을 미륵의 化生으로 여기게 되었음을 미륵선화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랑은 인생관의 지표로 미륵불신앙을 믿게 되었으며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죽음으로써 미륵불이 되어 다시 화랑으로 태어나기를 열망하므로써 임전무퇴로 호국전쟁에 앞장섰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의 閔由頁傳에는 화랑도가 승려들조차 글을 배웠다고 했다. 당시 신라 사회의 지식층은 대부분 승려였다. 이와 같이 불교와 화랑도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또한 불교가 호국정신을 기르는 정신적 지주였다. 불교에는 이상적 국가와 국왕에 대하여 說한 경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仁王典 같은 것은 호국경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불법이 성하면 諸佛의 호위에 의해 국가가 번영하고 국가가 성하면 불법도 성하여진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나라가 玄妙한 道가 있어 三敎를 포함하는 뿌리가 됨과 동시에, 그 뿌리에서 접목된 미륵 불교신앙이 화랑으로 승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래서 국토가 용화세계이고, 명산대천은 국선 풍월도들의 수련도량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장악한 불교는 화랑도와 연결되어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나. 儒敎思想
신라시대에 유교도 일정 부분 그 시대 정신의 형성에 작용 했음을 알 수 있다. 내물왕 시대에 신라가 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유교같은 중국인의 정신체계가 당시 화랑도의 의식구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가 한국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명확한 자료가 없으나 戰國末이나 漢代의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유교사상은 공자가 戰國이란 혼란한 시대를 건지기 위하여 修身 齊家한 다음에 治國 平天下 하는 것으로 먼저 개인적으로 윤리 도덕의 이상인 仁, 사회적으로는 禮를 세우는 安仁 復禮를 주장한 것이다. 즉 仁․禮는 인격형성과 사회질서의 근본 원리로서 이를 스스로 행하고 남에게도 이행시키고 사회에도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수기치인이며 사회재건의 길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외래문화에 대한 극히 강한 저항을 지녔던 민족성 때문에 이러한 중국의 문화를 늦게 받아들인 나라로 유교의 수용 역시 늦어 신문왕 三年(682년)에 비로소 국학을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는 종교적인 면보다는 학문과 사상으로 화랑도의 이념형성과 윤리성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신라 사회에 있어서 유교적 전통은 삼국사기에 인용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화랑도의 연원을 보면 玄妙한 道가 있다 하였고 또한 뒤를 이어, 집안에 들어서면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 고유의 도덕과 유교를 잘 결합시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진흥왕은 “우리나라를 중흥하려면 풍월도를 중흥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儒․佛, 도교의 精髓를 모두 지니고 있는 우리 고유의 종교인 仙을 말하는 것으로서 진흥왕은 특히 이를 숭상하여 古仙道를 부흥, 화랑도로 체계화함으로써 신라의 국력을 일신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화랑도가 국가 유사시에 忠道를 다할 것과 또 詩經, 尙書, 禮記, 春秋 등 유교경전의 습득을 盟誓한 것은 화랑도와 유교사상과의 깊은 관계가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들 화랑들은 평소에는 무예와 경전을 공부하여 교양을 쌓았고 특히 毛詩, 상서, 예기, 춘추 등을 공부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뿐만 아니라 詩를 통한 감정의 순화와 풍악을 통한 화합과 존경에 바탕을 두어 윤리를 지키며 역사를 통한 大義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유교경전이 유교적 차원을 넘어 문화, 예술, 역사의식 등의 실천을 목표로 자연스럽게 화랑도와 그 사상적 관련성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원광의 세속오계는 이러한 목표의 실천 덕목으로 볼 수 있다. 세속오계의 사상배경이 불교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으며 당시의 사회적 지도이념으로 볼 때 유교의 忠, 孝, 信, 勇, 仁, 五德目이나 三綱五倫의 영향도 크다고 하겠다. 즉 원광이 승려가 되기 이전에 이미 유학이나 도교의 교리에 造詣가 깊었기 때문이다. 즉 효사상은 원광의 세속오계 이전부터 화랑도의 근본이념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이는 분명히 유교의 근본정신과 효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충효사상은 충, 효, 信으로 이루어져 오계 중에서도 유교의 사상으로 만들어진 계율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세속오계의 충효는 중국의 유교식 말하면 효가 충의 바탕이 되며 (忠信求孝子之門)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유교사상과 달리 효보다는 충을 앞세우는 화랑들의 강렬한 공동체의식을 나타냄으로써 강한 국가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충을 함으로써 효를 실천했고 주체성의 유학적 정의는 충의 사상에서 발단된다. 충의사상은 “자기자신의 최선을 다함”이라는 盡己精神의 표현과 같다하여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려는 것이다.
다라서 신라에서의 충은 화랑도 뿐만 아니라 누구나 반드시 준수해야 할 윤리였다. 그리고 화랑도가 국가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진흥왕 대에는 유교도덕이 상류사회에 전래되어 있어 유교사상이 하나의 지도이념으로 이용되었다. 화랑도가 새 시대의 인재로서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화랑은 자신과 국가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화랑도가 정치적으로도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신라사회에서의 유교는 종교로서 보다 학문적․사상적 입장에서 주로 영향을 끼쳤으므로 화랑도 역시 큰 영향을 입었음을 물론이나 그것은 조직과 기능면 보다 주로 이념과 정신면에 크게 관련되어 있다. 화랑도가 국가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진흥왕 대에는 유교 도덕이 신라의 상류사회에 침투되어 있었으므로 공식적 편제가 이루어진 그때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풍류도에 유교의 덕목이 혼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다. 道敎思想
삼국시대에는 동양사상의 근간이 되고 있는 도교사상이 성행하였다고 보인다. 도교는 원래 後漢末에 불교의 영향으로 재래의 불노장생 신선사상에 노자의 無爲自然의 설을 가미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도교가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이미 고구려에 도입되었음을 고구려의 고적벽화 중에 도교적인 색채를 띤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史傳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영류왕 7년(서기 624년)에 당고조 李淵이 도사를 명하여 天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고구려에 보내어 노자를 강설하여 왕 이하 도속 등 수천명이 경청하고 그 이듬해 왕은 사람을 보내어 도법을 救했다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도교는 이전부터 이미 고구려에 들어 왔던 것 같다. 또 소문이 왕에게 고하여 당으로부터 도사 숙달 등 8인과 노자 도덕경을 보내어 왕이 기뻐이 맞이하여 佛舍에서 거주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불교와 함께 도교의 진흥을 꾀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고구려 말경에는 도교가 성향하여 불교가 위축되기도 했다.
한편 백제는 周書 異域傳에 의하면 ‘儈尼와 사탑 등은 매우 많았으나 道士는 없다’하는 기록으로 보아 도교가 성행하지는 않았지만 老莊 및 신선사상은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즉 백제의 瓦專중에 山景塼을 보면 品字形의 三峰이 겹치고 산 아래는 바위가 있고 산 위에는 숲이 중앙에는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오른쪽에는 도사와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분명히 三神과 道院道士를 표현한 것으로 신선사상이나 도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라는 도교 전래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道家 내지 신선사상의 영향을 화랑도의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도교 기록은 삼국사가의 신라본기에 나와있다. 즉 “여름 사월에 당의 刑疇가 老子道德經 등의 문서를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자의 도덕경이 신라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으며 화랑도의 생활양식이 도가의 현실주의적이며 무위자연주의적 사상과 결합되기 쉬운 것임이 ”山水에서 놀아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기록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는 특히 도가적인 영향이 농후하였다고 보이며 화랑도를 국선 또는 선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일컬어 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삼국유사」권 제삼 미륵선화에서 보면 “왕은 天性이 풍미가 있어서 크게 神仙을 숭상하여”라고 되어 있고, 同書권 第二 효소왕대 죽지랑에 “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바아 이를 더욱 뒷받침 해 주고 있다. 그래서 최치원도 그의 「난랑비서문」에서 “모든 일에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仁을 실행하는 것은 周나라 주사(노자)의 종지였으며 [도교]…”라고 하여 이를 중국의 도교로 표현하였는 바, 화랑도 사상에는 도교사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표현임이 분명하다.
도교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老子의 자연주의와 莊子의 지혜주의를 합한 정신자유의 도가사상이다.
도교는 자연발생적인 종교를 고대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 易理陰陽, 오행, 識偉m 의술, 占星 등의 논법과 이론에 주술적인 신앙을 합해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여 불로장생을 주요목적으로 삼아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 종교이다. 따라서 유․불은 물론 다른 미신적 신앙과 무리없이 받아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치원의 鸞郞碑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라고 하는데”이는 三敎를 포함한 것으로서 화랑도를 풍류도 혹은 풍월도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 玄妙의 의미는 老子의 도덕경에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는 도가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화랑도를 현묘지도라고 부르는 것은 도가적인 의의가 짙음을 말하는 것이다. 所記의 銘文대로 본다면 풍류도는 유, 불, 선, 三敎를 포함한 현묘지도라 했으니 삼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풍류도의 성격이 實乃包含敎“라 하는 것은 삼교를 조화 또는 집성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유정신이 본래 삼교의 성격을 포함했다는 의미로 유, 불, 선 그 이전에고유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에는 유교의 윤리사상과 공중도덕에 연결되는 계율이 들어 있고 화랑도를 국선도라 하는 것은 나라의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교류의 신선사상이 화랑도사상에 들게된 淵源性이 문제이다. 즉 중국의 노장사상에서 전래되었다고 보느냐 신라의 고유한 사상에서 나왔다고 보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화랑제도가 마련되기 이전부터 중국의 도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최치원의 鸞郞碑文에서 “處無爲之事行不信之敎周柱史之宗氏”라고 하여 이를 중국의 도교로 표현하였는바 화랑도 사상에는 연원적으로 도교류의 신선사상이 들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화랑은 귀족중 용모가 단정한 소년을 뽑아 風月主(원화화랑, 국선화랑)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화랑단을 만들어 道義硏磨, 情操涵養, 국토순례 등을 하며 행실 卓技者를 선출하였다.
신라과 원광을 통해 三敎融合思想을 화랑을 주역으로 하여 실현시킴으로써 화랑정신이 우리 고유신앙에 삼교사상을 발전적으로 잘 조화 포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원광의 세속오계와 같이 화랑도들의 수양방법중 遊娛山水는 도교적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이것은 老壯의 無爲自然이라고 하기보다는 심신을 수련하는 有爲自然이라고 볼 수 있다. 허송세월하는 것이 아니라 山水에서 깨끗한 정신을 기르고 더 나아가서는 군인정신까지 無垢情純한 순수성을 바탕으로 한 수양방법으로는 더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고 판단 된다.
또한 화랑도를 국선도라 한 것도 원광의 유, 불, 선, 삼교 조화사상과 세속오계 등을 통해 화랑도에는 도교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도교사상이 사회의 주도적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도교의 영향을 받은 화랑도가 현실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사상과 결합함으로써 신라 통일 후 태평 시대에 있어서는 그 사상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라. 天神思想
고대 사회에서 우리 조상들은 神이 우리 운명의 주관자나 불의에 대한 심판자라고 믿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하늘을 숭상하였는가 하면 또한 山神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즉 고대인들은 하늘과 산을 동일시한 것으로 믿어진다. 天神은 높은 곳에 있으므로 높은 곳인 山에서 내려 온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산을 神聖視하고 숭배한 원시신앙이 성립 되었다. 산을 천신이 내려 오는 곳 신과 인간이 교섭하는 성스로운 곳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종교사 전체에서 발견되는 데 “단군신화”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옛날에 桓因의 庶子 환웅이 있어, 항상 天下에 뜻을 두고 人世를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내려다 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風伯雨師․雲師를 거느리고 穀․命․病․形․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사를 맡아서 인세에 있어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를 보아 민속 신앙이 지니고 있는 산신신앙이나 木神신앙이 근본적으로는 천신사상이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인들은 六部의 할아버지들이 다 하늘로부터 신라강역의 여러 산꼭대기로 강림하였다고 생각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천신숭배의 의식과 산천신숭배, 특히 명산 숭배의식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신화의 형태라 할 수 있다. 한 종족이 자기 집단의 최초의 출발점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는 신화의 형식은 그저 사실을 담담하게 기술하여 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집단 나름의 가치의식을 포함시켜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이 구성원들의 유래를 최종적으로 하늘에 귀속시키는 것은 바로 하늘이 그들의 가치의 대상이고 숭배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화랑도의 경우 신에 대한 공동숭배라는 입장에서 보면 천신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한국전래의 천신사상을 살펴보면 단군신화와 맥을 같이 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 와서 고대 샤머니즘의 바탕 위에 선 제정일치 시대의 산물로서 고조선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중 이필영은 단군신화의 중심사상이 청동기시대의 우세부족 및 우두머리 신성화에 따른 천신신앙에 있다고 보았다. 즉 여러 단계의 종교사상이 신화 사유개념과 결합하여 천신사상으로서의 단군신화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한국의 사상에 천신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체계화 하였다. 즉 “천신인 환인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지상에 派遺한다”는 것은 단군이 천신 신앙의 구조안에서 천신의 化身이자 祭天을 담당하는 司祭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신화의 형성기에 최고의 신으로서 하늘을 신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천신관념은 단군신화와 蘚塗의 천군을 거치는 동안에 천신사상으로 변하여 고대사회의 이념체계로서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천신신앙은 산신신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산신신앙이 있었으며 신라도 산악신앙 또는 산신숭배가 현저한 나라로 특히 토함산은 일찍부터 신성시 되어 왔다.
이상에서 볼 때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사상은 역시 천신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이러한 한국 전래의 천신사상과 신라 화랑도가 어떻게 사상적 맥을 같이 했나 살펴 보기로 하자.
신라 화랑의 무리들이 산악을 巡行하면서 심신수련과 군사적 기능을 습득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수양했던 것은 화랑이 천신사상과 결합했음을 보여 준다. 그 일례로 김유신의 경우를 보면, 그는 산중의 동굴에서 영모자인 샤만을 통해 초인간적 靈力을 몸에 익히거나 혹은 샤만을 통해 산신의 의사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즉 샤만을 통해 인격의 전환과 자기개혁을 꾀한 것이라는 점에서 화랑의 인격 형성과정에 巫覡的인 신앙요소가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고 “濟戒告天盟誓”를 통해서 천신사상을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화랑들이 巡行한 대표적인 산악이 금강산이었다. 천신사상은 화랑의 서약으로 추정되는 壬申서기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二人井誓記 天前誓今自 三年以後忠道執特過失先誓若此事失 天大非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幸未年七月甘二日大誓 時尙書禮傳倫得誓三年』
이것은 한국 고대인의 天에 대한 의식과 함께 화랑들의 天에 대한 의식 및 산앙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의 천신은 인간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실재하고 있으며 인간의 삶에 직접 관여한다. 천은 敬虔하며 절대적이어서 『천과의 서약을 반드시 지켜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면치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서기석에서 두 사람의 서약은 세속적 信約이 종교적 신성성을 정점으로 하여 조화되는 신과 인간과의 관련구조를 알게 해준다. 이것은 신과 사람과의 관계가 세속성과 신성성의 조화이며 神人合一의 경지를 말하며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종교의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 문헌이나 자료의 분석에 의하면 고대 한국인의 천에 관한 의식이 신라 화랑도의 기반을 이루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천신사상은 巫覡신앙의 최고의 신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삼한사회에서는 蘚塗의 천군으로 계승되었고 삼국시대에 와서 그 천신사상은 외래사상인 유, 불, 도, 삼교와 조화되어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화랑과 한국 고대인의 천에 대한 신성성의 표현이 풍류도라고 보여진다.
마. 花郞徒와 世俗五戒
세속오계에 관한 사료는 『삼국사기』권 제 45 열전 제 5 귀산조와 『삼국유사』권 제4 원광서학조에 나온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산은 沙梁部 사람인데 … 귀산이 어렸을 때 같은 部의 살마 추항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꼭 士君子와 더불어 놀아야겠으며, 먼저 正心修身하지 않으면 아마 逢辱을 면할지도 모르겠다. 어진 이 곂에 나아가서 道를 붇지 아니하려 하는가?』하였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에 있었는데 … 귀산 등이 그 문하로 공손히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속사가 어리고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종신토록 계명을 삼을 일언을 주시기 바라나이다』고 하였다. 법사가 불계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자로서는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一은 임금을 섬기기를 忠으로써 하고, 二는 어버이 섬기기를 孝로써 하고, 三은 친구 사귀기를 信으로써 하고, 四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고, 五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실행에 옮기어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는데 이른바 살생유택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육제일과 봄․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택하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말․소․닭․개와 같은 類를 말한 것이며, 작은 물건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들은 물건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그 소용되는 것에 있어 많이 죽이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세속의 선계라고 할 것이다. 귀산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행하여 감히 실수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보아 이선근은 “화랑의 세속오계라고 명시한 바는 없으나 불교의 고승인 원광법사가 귀슨 등에서 일러주되 「너희들은 남의 신자」라는 전제 아래 보살 십계를 권하지 않고 신자가 지켜야 될 당시의 세속오계로서 대신한 것이니 화랑도의 戒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나, 세속오계가 화랑들만의 것이 아니며 원광법사가 가르쳤다고 해서 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고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 석학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 1덕목인 事君以忠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라는 뜻으로 국왕에 대하여 신하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유교덕목의 실천과정은 자기로부터 확대되어 가는 바 「盡己之謂忠」이니 「盡心日忠」이니 하는 말은 모두 忠이 바로 중심이란 뜻에서 시작해서 그를 확충하는 데서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儒家덕목의 근본이 자기에 연결지워 있기 때문에 盡己盡心의 忠은 확대되면 타인에게는 「恕」가 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는 헌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으로 忠은 본래 자기의 완성이었던 것이 국가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발전되어 위정자의 臣에 대한 편의한 요구가 되고, 또 臣의 입장에서는 도덕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될 지대한 의무이기도 하였다. 세속오계에서 事君以忠을 제1덕목으로 한 것은 忠을 국가적 차원에서 의의를 지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원광이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일이 아니나 貧道가 대왕의 나라에 있으면서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쫓지 아니오리까 하며 乞師表를 바친 것을 보아도 국가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제2계목인 事親以孝는 효도로서 부모를 섬기라는 가정도덕이다.
신라에서는 孝忠一本의 입장에서 가정과 국가를 분리하지 않고 大我的인 견지에서 가정의 확대를 국가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효가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전사하는 것이 부모에 효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김유신과 그의 아들 원술랑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 외의 신라 화랑도들의 전쟁터에서의 장렬한 죽음은 다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제3계목인 交友以信은 화랑도와 같은 집단생활에서 필요한 사회존립의 기본 윤리가 하겠다. 교우유신은 벗을 사귀되 신으로서 한다는 의미로 「信」은 「人」과「信」을 합한 합의의 문자로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언어나 약속을 거짓없이 하라는 것으로 인간생활의 근본이요 사회 존립의 기본 원리이다. 이것은 유교적 信義를 평범한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랑에 있어서의 이 信義는 「임신서기석」에 나타나 있듯 “두 사람이 하늘 앞에 맹세하노니…과실이 없기를 맹세하고 만약 이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죄를 얻으리라”라고 한 例와 사다함 역시 ‘約死友’하고 이것을 충실히 지켜낼 수 있었던 예는 어떤 신앙적 차원의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화랑의 철저한 의리 정신의 소치라 하겠다. 信義는 相磨以道義와 더불어 유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불교에 있어서 이 信은 신의, 신뢰, 신망, 情爭心 등인 것이다. 화랑도는 正義와 信義로 신라 사회를 밝게 하고 화랑도의 단결을 가져왔으며 동료 간에 共生共死하는 맹서와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강력하게 만들었다.
제4계목인 臨戰無退는 싸움에서 물러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화랑들의 강렬한 공동체의식과 滅私奉分하려는 숭고한 희생정신의 소치라 하겠다. 훌륭한 武士가 곧 유능한 지도자였던 삼국은 그들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게 되었으니 자연히 文보다 武를 숭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사 정신의 기본이 바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말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임전무퇴를 외치고 분전하여 함께 전사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김유신․관창․김영유 등은 화랑이었으며 김흠운은 낭도였던 사실로 보아도 신라군의 임전무퇴의 戒는 화랑도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결국 화랑도들은 大無畏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였으며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는 자신을 희생하여 督戰하는 일종의 결사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정신은 당시 삼국간의 전쟁이 빈번했던 때인만큼 가장 뚜렷하게 작용했고 孝悌忠信의 방법처럼 여기기도 했다. 승려의 신분인 원광법사가 불교적 계율로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신라인의 입장에서 호국적인 차원에서 제시한 것이라 판단 되어 진다.
제5계목인 殺生有擇은 생명이 있는 것은 가려서 죽이되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원광법사가 승려이면서 살생을 엄격히 금지시키지 않고 다만 선택할 것을 경계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한 귀산 등의 질문에 원광은 “六濟日이나 春夏月 등과 같이 때를 가리고, 집에서 기르는 작은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리도록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부득이한 실제적 현실 속에서도 無慾, 無我, 無私할 수 있는 화랑들의 순수한 정신적 경지에서 요구되고 실천될 수 있는 戒律이라 하겠다.
원광의 세속오계를 분석해 보면 忠, 孝, 信, 勇, 仁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중 충, 효, 신의 덕목은 儒家만의 사상이고 仁은 佛家만의 덕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유교가 이상으로 삼는 군자들의 엄정한 규범의 차원과는 맥락이 다른, 보다 강렬한 沒我的인 신앙적 차원에서 세속오계가 받아들여졌음을 본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화랑들을 중심으로 한 신라 청소년들에게 요구한 세속오계의 참뜻이라고 하겠다.
2. 사상적 특징
화랑도의 종교적 배경은 샤머니즘, 유교, 불교의 어느 하나의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세 종교에 골고루 근거하고 있으며 오히려 화랑도가 이 세 종교의 신앙과 윤리를 하나의 문화조직 속에 종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화랑도의 최초의 근원은 샤머니즘에서 출발된 것이었으나 샤머니즘의 제약성에 물들지 않고 주체성을 가지고 타종교(유․불)를 절충 활용하여 국가 사회에 봉공하도록 힘을 기르고 발전시켰다. 형술 신앙으로서의 샤머니즘 그 자체는 문화적 꽃을 피울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샤머니즘이 고대인의 기본적 종교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라면 거기에는 분명히 민중의 삶을 지탱케하는 일정한 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거기에 어떤 조직화된 사상적 요소나 사회적 요인이 게재되어 뒷받침해 줄 때는 하나의 문화적 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가능성이 한국사 속에 실현된 것으로 최초이며 전형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도이니, 화랑도는 바로 샤머니즘의 뿌리 위에 유교, 불교 등의 외래 종교사상을 매개로 하고 이들을 신라의 풍류로서 종합하여 하나의 문화적 조화를 이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랑도의 수행 이념상으로 보면 처음에는 고대 한국의 무사도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공적 보호와 육성을 받게 되고 신라 사회의 청소년 조직을 대표하는 문화적 기구로 발전하면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속에 그 수행 이념이 집약되었다.
세속오계는 유, 불, 선 삼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다. 入則於孝하고 出則忠於國한다는 그들의 충효사상은 물론 유교적 덕목이고 交友以信의 信義思想도 유교적 덕목이다. 그러나 화랑도의 충효사상은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재래의 샤머니즘 신앙 속에 미숙하나마 같은 내용의 사상이 유교가 들어옴으로써 매개되어 충효의 사상이 실제적 덕목으로 성립된 것이다.
‘높은 윤리적 사상이 가끔 대중의 미신적 관념과 섞여있다’는 F.Rawlinson의 말과 같이 이미 한국 샤머니즘의 死靈崇拜, 家神崇拜 사상에는 孝사상의 윤리적 기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샤머니즘의 종교적 미개성으로 해서 사회적 윤리로 체계화 되지 않은 것이 유교의 효를 받아 사상적 체계를 갖춘 것이라 보겠다. 논어에 ‘孝悌는 인을 구하는 근본’이라 하였고, 효의 방법에는 ‘어버이 살아계실적에 禮로서 섬기고 돌아가면 예로서 장사하고, 예로서 제사지내면 효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효도의 의무는 부모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까지 계속 되는 것이므로 조상숭배와 연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상숭배와 연관되는 효는 바로 가정의 결속을 가져오며 가정의 결속은 사회적 대동단결의 기반이 되어 충의 이념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회 윤리적 요청에 부응하여 충효의 사상은 샤머니즘의 家神, 始祖神信仰을 수용 종합하여 화랑의 가장 으뜸가는 이념이 되었다.
또한 臨戰無退의 무용정신은 타인의 위험을 보면 죽음으로서 구한다는 古代仙人계급의 무사도가 호국적인 사상에서 충을 행하는 실천 덕목으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인의 호국사상은 화랑의 중도들이 不殺生의 불교 윤리를 실천하는 데 방편적인 교리로 채택하였으니 殺生有擇의 이념이 그것이다. 이것은 비록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직접 명령은 아니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니 분명히 그 원리는 불교의 불살생의 戒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원광이 비록 불승이었으나 화랑의 수행이념을 제시함에 있어 유, 불, 선 삼교의 모든 덕목을 종합하여 오로지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 세속오계를 설했던 것이다.
화랑도를 조직상으로 보면 진흥왕 이전에는 제정이 분리된 초기에 무의직능을 수행하는 종교적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것은 진흥왕이 처음 원화를 세울 때 여자를 택했다는 점에서도 조직의 샤먼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으며 여자들이 말썽을 일으키자 화랑을 미소년 중에서 뽑고 전분장식을 시켰으며 최고 화랑을 국선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조직의 선교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가 깊이 침투되고 특히 신라 불연극토 사상과 함께 彌勒下生信仰이 만연함에 따라 화랑도의 조직도 그 영향을 입어 국선과 미륵을 동의어로 사용하였다.(至今國人稱神仙曰彌勒仙花 凡有摸係者曰未尸, 皆慈氏之遺風也)라 하였으니 신선과 미륵이 화랑도의 조직속에서 종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륵의 화랑작화신앙이 만들어 낸 신라인의 호국불교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미륵이 만일 신라를 위해 환생한다면 당연히 이상적 국선 화랑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만큼 신라인들이 화랑을 믿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화랑도를 풍월도라고 하거니와 과연 풍월은 『멋』이요 『멋』은 한국적 『미』이며 이 한국의 『미』는 단순한 예술적인 미가 아니라 도덕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종교적 생활미로서 관용, 단합, 겸양, 희생 정신 등을 전제로 한 『조화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화랑도의 조직 속에서 신랑의 종합된 신앙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화랑을 기능면에서 볼 때도 화랑도는 역시 삼교의 종합적인 성격을 찾아 낼 수 있다. 相磨以道義라 하여 그들이 도덕적 수행을 하는 데에는 주로 유교의 목록을 생활하는 것이었고, 相悅的 가락으로 정서를 함양으로 유오산수하여 종교적 呪術을 행하며 호연지기를 키워 국가에 이바지할 무술을 닦는 일은 처음에는 신선을 지향하는 샤먼적인 것이었으나 불교의 융성 이후에는 불교적인 것과 혼합을 이루게 되었다.
龍華香徒의 수령인 김유신의 화랑 수행 행적을 보면 그는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세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의 신라 침토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홀로 中嶽의 석굴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구국의 인재가 되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4일 만에 老人(神靈)을 만나 그 비법을 얻었던 것이다.
그의 수련장이었던 中嶽의 석굴인 바로 斷石山의 석굴이다. 이는 오늘날 신선사라는 우리 나라 최고의 석굴사원으로서 북남동 삼방에 미륵삼존의 거상이 새겨져 있음이 최근 밝혀졌다. 그러므로 김유신의 郎徒들은 용화향도라 칭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석산은 신라 화랑의 창연도장이었으며 이 곳에 신선사라는 미륵전당이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 때 화랑 김유신이 하늘에 간구하다 신선을 만난 것은 순전히 샤먼적 요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석굴이 신선사라는 절이 되고 미륵 신앙의 전당이 된 것은 신선과 미륵을 동일시한 화랑의 이교 종교적인 사상체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화랑도의 교육사상
1. 화랑도의 교육목적
화랑도가 시작된 동기는 처음부터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제도, 혹은 인재를 선택하기 위한 고시제도로서 출발했다. 특히 화랑도의 조직이 요청되던 당시의 신라사회는 고구려․백제로부터 오는 외침을 방어 할 필요에서 새로운 청소년 집단의 훈련과 인재의 양성이 요청되던 때였다. 『삼국사기』에는
37년 봄에 비로서 원화를 받들게 되었다.……사람들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擧用하려 하여
라고 되어 있고『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또한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는 학교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화랑제도로서 인재 등용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랑도의 목적이 인재의 발굴과 조정에의 추천이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재양성이란 평시에는 풍부한 학식과 인간성을 갖춘 관료의 양성을 뜻하는 것이며, 전시에는 목숨을 바쳐 報國하는 剛勇한 무사의 배출을 의미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신라사 전체로 볼 때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가는 발흥기였다. 즉 축적되어온 국력을 가지고 원근 제소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낙동강 유역의 가야연맹제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또 북으로 남북 한강유역의 濟麗고지를 영유하였고, 대륙문화를 직접 섭취하기 시작하여 고유문화의 융합을 도모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성에 비추어 볼 때 위정자로서
첫째,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발전시켜 둘째, 새로운 영토확장으로 생긴 새로이 증가된 국민들에 대한 포용 및 동화정책을 추진하여 셋째, 삼국정립이라는 새로운 긴장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평상시에는 교육을 위한 수양단체로 인재를 양성하여 등용하고, 전시에는 군사단체로서의 역할을 하여 개인적으로나, 혹은 단체적으로 전공을 세워 국가수호에 힘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화랑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된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였다고 하겠다.
한편 신라에서 행하여진 인재등용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화랑도 교육이고, 둘째는 弓箭으로 인재를 택하였다는 궁전법인데, 이는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행하였는지 분명치 않다. 셋째, 독서출신과로서 독서력, 즉 유학의 지식에 관한 고하로써 인재를 채용하게 되었다. 즉 삼국통일 전까지는 화랑도교육과 궁전법으로써 인재를 택하였는데, 이로부터 독서삼품출신과의 문관을 등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볼 때 신라의 인재등용법은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화랑도 교육으로 인물 본위의 교육제도를 채택했으나 통일 후에는 국학이 완비하여 유학의 이념이 연구, 보급됨에 따라서 일종의 학벌본위, 시험본위의 교육제도로 진행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라정치의 문무교체를 의미하며, 더욱이 신라가 봉건제도를 확립하는데
는 다른 무엇보다 과거가 적합한 교육제도의 하나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국학내의 학생들의 성적에 의하여 관료로 등용하는 제도는 어떤 점에서 볼 때는 국학이 완비되어 학문의 성황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한된 관입체제에 대하여 귀족의 수는 늘어 모든 귀족을 관리로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이러한 귀족상호간의 관직, 관위를 에워싼 족당적 대립을 제거하려는 국가의 요구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랑도 교육은 신라국가를 다스릴 중심인물을 양성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군인, 무사가 될 수 있는 국방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
화랑도의 교육목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의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화랑들의 국가나 벗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으며 의를 태산같이 여기어 의가 아니면 천금을 주어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국가와 단체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는 데에 참되고 보람된 생활을 얻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둘째, 용감한 병사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국의 안전과 국방을 위해서는 군사적 훈련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화랑도 교육은 국토방위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용감한 병사와 실천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조국 앞에 개인의 이익을 용인하지 않고 조직과 규율을 통하여 언제나 대아에 희생할 수 있는 인간양성을 위한 교육이었다. 이로써 볼 때 화랑도의 교육목적이 평시에는 국가사회에 유익한 인물을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전시에는 강용한 무사의 배출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화랑도 교육이 구체적으로 추구한 인간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탁월한 이상과 경륜을 가진 국가대위의 棟梁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화랑으로는 진덕, 태종, 문무, 신문왕의 4대에 塚宰를 역임한 명망이 높았던 이들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애국충성에 불타는 용감한 전사로서의 인간이다. 사다함, 심유신, 관창, 김흠춘 3대 등과 사후에까지 위국충절을 다한 장춘낭 등의 화랑들이 대표적 존재이다. 또 화랑의 충용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라고유의 전통정신의 풍토 속에 함양된 것이라 하겠다. 셋째, 정의와 청렴, 사랑과 의혐 등 국민도의나 사회윤리에 투철한 인물이다. 넷째는 산천을 유오하며 가락을 즐기는 고결활달한 멋을 지닌 인물로서 명승과 성지를 순례하고 國泰安民과 인정미사의 향가를 노래하며 국토애를 충성화합의 정신으로 가꾸던 모습은 주로 통일 이후의 화랑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목표를 종합하면 문무와 지덕이 겸비되고 지성과 정서가 융합된 심신일여, 지행합일의 조화된 인간상으로 집약되며, 이것이 바로 강한 주체성으로 외래사상을 조화시킨 풍류도에서 요구하는 이상이다.
이렇게 화랑도 교육은 강인한 무사도 정신과 무술훈련을 통해서 전시에는 국토방위의 충실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을 길렀다. 또한 그들은 항상 조직과 규율을 통해 사회적 협동의식과 대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정신력은 물론 자주 자립의 독립정신을 함양하였다.
2. 화랑도의 교육내용
화랑도의 수양내용을 『삼국사기』에서는 "서로 도의를 닦고 음률을 즐기고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다니면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들이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화랑도들의 정서 도야, 현실 중시, 자연 예찬, 풍류 운치의 생활 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화랑도의 생활양식이나 교육내용은 지적인 면보다 활동적이면 즉 도덕적, 정서적, 신체적, 군사적 훈련을 주로 강조한 이러한 교육과정 속에서 화랑들의 인격 교육과 인간관계의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이 교육내용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도의수련과 인성도야인 바 화랑도의 연원이 우리의 고유신앙과 원시사회의 공동체적 습속에서 유래되고 청소년집회의 중요기능의 하나가 종교적 의식에 있었던 만큼 화랑의 도의수련은 종교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되는 것이다. 또한 원시사회에서는 종교가 바로 생활이요, 교육이었던 만큼 초기 화랑단은 그들이 수행하는 종교의식을 통하여 그 사회의 윤리나 법속을 자연스럽게 익혀갔던 것이다.
따라서 화랑들은 교우관계를 통하거나 집단생활을 통하여 속은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서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덕목을 몸소 체득하고 실천을 통하여 서로를 격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의교육이 어떠한 강독교재를 사용하여 실시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니 그 당시 고구려의 경당에서는 오경과 사기․한선․후한서․삼국지․춘추․옥편․자통․자림․문선 등의 교재를 학습하였고 신문왕 2년에 설립한 통일신라의 국학에서는 논어․효경․예기․주역․좌전․모시․춘추․상서․문선 등의 교재를 학습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들도 상기 종류의 경서를 중심으로 교육하였음이 분명하다.
화랑도 교육도 종래의 종교교육이나 생활교육을 통한 도의수련을 벗어나 도덕윤리의 이론적인 추구로 발전하였으며 현실윤리를 중시하는 불교경전, 즉 『효경』논어와 오경 등이 화랑교육에 있어서 더욱 중시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정서도야를 중시했다. 즉 가무․음악․시가 등을 즐김으로써 정서를 순화했다. 청년집회의 기능 중 呪的歌舞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청년집회의 가무는 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범제의 핵심을 이룬다.
원래 이 가락과 가무는 원시시대부터 인류사회에 있어서 민족에 따른 차이는 있겠으나, 신앙에 따른 제의적 기능과 단결적 기능 그리고 오락적 기능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원시시대로 갈수록 신앙적․제의적 기능이 중요시되는데 신라의 가락, 가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 “이 해에 민속이 즐겁고 편안하매 비로소두졸가를 지으니, 이는 가락의 시초이었다. ”라는 기록이 최초이다.
여기서의 음악은 시가 관련의 평화로운 유락이 아니고 신라가 고구려를 침입하려할 때 전승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뜻의 가무였을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 당에 침입하여 十郡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가곡도 呪的 가요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화랑들의 “상설이가락”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 매우 풍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어떤 내용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기록에서 분명하지 않다. 이밖에도 가락은 향토의 전통과 애향을 담은 향가, 전승과 전공을 담은 군가, 우정의 담은 시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애국의 노래, 자연과 신을 노래한 것 등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인의 가무를 애호한 것과 화랑집회의 가무가 呪歌的 성질을 지니고 일면, 전쟁에서의 전승을 기원하고 전사들의 사기를 높이며 싸움에서 돌아와서는 전승을 祝賀하였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14首 중 6수가 승려낭도에 의해 지어졌거나 관계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혜성가』와『도솔가』는 원시적인 주가의 잔영이라 할 수 있고, 나머지도 충군애국하고 호국안민을 기원하며 위대한 화랑을 찬미하고 아름다운 우애와 인정을 謳歌하는 애국애족적인 정서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화랑의 가무는 단순한 정서도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국민정신진작을 위한 중요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셋째로는“유오산수” 로 표현된 국토순례의 교육과정이다.
화랑도의 무리, 즉 신라의 청소년 집단은 처음에는 향토인 경주를 중심으로 그 당시 삼화령, 삼산, 오악 등으로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으나, 후일 영토의 확장에 따라 강원도의 동해안 금강산, 경포대, 삼일포 등지의 먼 곳까지도 찾아 다녔다. 그들은 국토를 순례하며 현장을 답사하고 국토에 대한 관념과 지식을 함양시키고 자연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고 역행하는 체력단련과 인고하는 심력연마를 도모하여 고유한 신앙적 신비와 조상의 사적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유오의 수양을 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토순례는 다양한 교육목적을 지닌 종합적인 실습훈련의 성격을 띤 화랑 특유의 교육과정이라 하겠다. 여기서 활달한 기상과 원숙한 품격을 갖춘 인재가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연을 인격수양의 도장으로 삼아 실제로 큰 성가를 올렸던 신라인들의 발상은 선인들의 유풍을 본받아 유례없이 훌륭한 것이라 하겠다.
넷째로 군사적인 기능의 습득을 위한 무술훈련을 중시하였다. 이는 청소년 집회의 군사적 훈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화랑집단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이다.통일기의 화랑교육의 과정은 덕육과 지육, 체육과 정서교육, 그 위에다 강건한 군인정신과 무술훈련 등 다양한 내용을 통하여 국가 유위의 이상적인 인재를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하고 조화된 과정도 화랑도의 각시기의 활동과 정신 및 훈련양식이 변천에 따라 신라사회의 역사적 변천과 함께 그 내용이 변모 되었다.
화랑의 무예 가운데 활쏘기는 당시로 보면 군사적 행동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습무의 군사적 목적은 부차적인것이고, 그것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중요시했던 것 같다. 신라에서 행하여진 인재등용의 방법 중 궁전으로써 인재를 택했다는 궁전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활쏘기를 잘 쏘는 善射者의 육성보다 활쏘기를 통해 덕과 예의 함양에 중점을 두고 활쏘기로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인간평가의 한 방법으로 취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3. 화랑도의 교육방법
화랑도의 교육은 집단적 공동생활을 통해서 도덕적, 인격적 교육과 군사적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실제적인 생활과정 속에서 종합적으로 학습하였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또한 현장에 나가 직접 행하고 경험에 의하여 체득하는 경험중심의 교육방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화랑도는 국가 교육기관이나 종교기관이 아니고 개인의 인격도야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스스로 모여든 청소년들의 단체였으므로 그들은 연령, 가문, 지위, 학문이나 무예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였을 것이나 이런 隔差는 개인행동을 통제하고 단체활동을 행함으로써 점차 해소시켜 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집단교육방법에 의하여 그들은 사회적인 공동체의식을 형성시켰으며 협동정신을 길러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길렀다. 또한 화랑도들은 그 조직에 있어 공동생활의 체제였고 교육과정은 지적인면 보다는 동적인 면이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교육은 생활을 통한 경험으로 체득하는 자연학습적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교육방법론에 있어서 합경험원리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수시로 경험이 갖는 교육적 성과를 중시할 때 다의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생활 이외에도 엄격한 충군의 이념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화랑도의 교육방법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종교 의식적인 수련이다.『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성지나 靈場에 독좌구진하여 구국, 討賊을 서원함으로써 신인에게 비법으로 전수받기도 하고 보검에 영험으로 부여받는 종교의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후일 불교 전래 후 화랑들이 미륵과 관음의 성지를 순례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것은 바로 화랑의 정신수련의 중요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화랑의 시범적인 언동을 통한 낭도의 교화이다. 화랑은 천거되었거나 추천도었거나를 막론하고 화랑단, 또는 당시 사회의 모범 청소년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부득이 맡았는데, 그 무리가 무려 일천인. 모두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화랑은 낭도들에게 있어서 우정 이상으로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그 화랑단의 지주요, 행동의 준거였다. 그러므로 화랑의 일거일동은 낭도에게 무언의 감화를 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화랑교육은 자발성과 공동체적 협동성의 원리를 토대로 하였다. 조직의 비강제성이나 과정의 비형식성이 자발성의 증거이거니와 스스로 종신지계를 갈구하여 불문을 찾은 귀산이나『임신서기석』에 나타난 두 청년의 굳은 서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평상시의 공동학습, 공동토의, 공동훈련은 물론, 국토순례의 조직적인 단체활동은 신라국민의 총화단결의 원천이 되었다.
넷째로 화랑교육은 철저한 경험주의와 실천주의에 입각하고 있었다. 직관과 행동을 통한 도의수련이나 인고와 세속을 타반하는 무술훈련은 물론, 국토순례시의 행군, 야영, 조간 등 조직적인 야외훈련이나 종합적인 임지교육은 모두 직접체험을 중시하는 교육방법이었다.
다섯째로는 학덕을 겸비한 고명한 사전을 통하여 교도를 받는 방법이다. 상술한 방법들의 원시종교에 있어서의 비의도적인 실제적 교육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 방법은 의도적인 이론적 교육의 특색이 현저한 것으로 통일을 전후하여 유교사상의 색채가 차차 짙어짐에 따라, 그 교육방법 또한 화랑교육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즉 불교의 자학자습과 설법방식이나 유교적인 인격감화, 개성개발, 사고궁리 등의 방식이 화랑교육에도 도입 되었음이 틀림없다.
여섯째로 화랑교육에서는 가정교육, 사회기풍 및 국가시책 등 교육환경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竹竹이라고 이름 지어 준 것은…어찌 죽음을 겁내어 살아서 항복할 것이랴
라는 竹竹의 作名由來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것은 바로 신라인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반영한 것이며, 이러한 기풍이 확대되어 신라사회의 건전한 정신풍토를 형성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은 바로 화랑정신이 요람이며 사회는 이를 강화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화랑들은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실용적이 능력을 개발하고자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자 힘썼던 것이다. 그들은 공동생활을 통하여 대인관계에서의 협동, 겸양, 신의의 귀중함을 체득하였고, 무사적 수련을 통하여 궁술, 검술 등 무술을 익히는 한편, 순국충절의 정신을 배우고 임전무퇴의 용기를 길렀으며 명산대천을 찾아 각지를 돌아다님으로써 인정, 풍속, 지리, 물산 등에 관한 견문을 넓혔고, 훌륭한 인물과 자주 하여 여러 가지 덕행을 본받게 되었으며, 예기치 못한 고난을 당하여서는 굴하지 않고 끝내 극복해 냄으로써 인내심을 기르는 좋은 기회로 삼는 등 교육적 실효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Ⅴ. 화랑도의 역사적 의의
화랑도는 신라정신의 중추이며 삼국통일의 역군인 화랑의 지도이념이요, 생활철학이다. 신라의 화랑도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공동분적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유불선 삼교의 외래사상을 흡수 융합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외래사상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으나 본래의 사상적 기초는 씨족적인 공동본의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국가적 이념으로써 비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화랑도의 역사적 의의가 있고 또 그것이 삼국통일의 지도이념으로써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도는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의 수한 습합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주본적인 전통사상이 외래사상을 융합 조화시켜 새로운 민족전통 정신을 창조한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배경이 그러하듯 신라의 화랑도는 고대사회의 종교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하나의 문화적 소산물이었다. 그러므로 화랑도가 신라사회에 끼친 정치 군사 교육 및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화랑도의 조직은 사회의 중견인물을 양성하는 교육적인 기능을 가졌으며 일상생활의 규범과 전통에 관한 지식과 협동 단결정신을 기르고 강인한 본력을 간마하고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어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호국의 역군으로 크게 국가에 이바지 하였다.
화랑도가 생겨서 불과 한세기만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능가할 수 있었고, 당인의 8년 주병도 격퇴하여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화랑도가 국가자분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발전시켰고, 민족사상을 크게 떨치게 하였으며 우리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자랑이라고 할 만한 화랑도는 국가적 운동이면서도 사조직으로써 종적, 횡적, 연계가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부족이나 문벌의 영화를 바탕으로 하는 기점에서부터 국가라는 지상존재의 이익을 위하는 목적으로까지 지향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화랑도를 국가운동으로 성공시킨 운영의 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랑도는 원칙적으로 귀족자제만으로 구성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화랑은 한 문호의 상징적 존재로서 중서인의 구심이 되고, 따라서 일단 국가적 직무에 나아갈 때에는 영도적 위치를 가지며, 또는 의표와 솔선의 역할을 한 것이다.
화랑도는 유능한 인재를 배출시켰고, 신라국민의 정신적 도결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또한 화랑은 신라의 청소년들로서 슬기와 용기를 간직하고 규율있는 훈련을 통하여 투철한 가치관과 국가관을 정립하여 조국신라를 수호하고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화랑도는 신라시대에 있었던 한 청소년 집단의 조직이었으나 신라사에 새로운 동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역사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정신사적 입장에서도 민족전통의 한 주류가 되었을 만큼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Ⅵ. 결론
화랑도가 한국교육사에 끼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업으며, 특히 그것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바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할 때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것이 무사도의 정화로서의 화랑정신 내지는 소위 화랑도이다. 이제 본 논문의 주요내용을 다음에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신라는 전통적으로 그 사회내부의 유대를 굳게 하여온 청소년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공동의 신에 대한 신앙과 의식을 통하여 일체감을 가지며 그 영역을 확대해 왔다. 신라는 전통적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보수성이 강하였다. 화랑도는 그러한 신라의 전통적 유제의 기반 위에서 외래사상을 주체적으로 포용하고 승화시켜서 국가적으로 재조직한 인재양성의 교육제도이며, 전사단이라 하겠다.
둘째, 화랑도의 조직에 있어서는 매 화랑집단 마다 최고 귀족인 진골출신의 화랑 한 명과 교사로서 그를 고문, 지도하는 승려낭도 한 명, 그리고 진골이하 평민에 이르는 천명 가까운 낭도들이 있다. 화랑집단의 성원은 원칙상 3년을 수련기간으로 정하여 집단생활을 한 듯하며 그 적령은 대체로 15세에서부터 18세까지로 추정된다.
셋째, 화랑도의 기능은 신라의 발전에 다양하고도 긍정적으로 발휘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왕권강화와 귀족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였고 사회적으로는 골품사회 내부의 신분 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였다. 교육적으로는 인재양성의 기능을 담당하는 한편 전사단으로서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다. 그리고 종교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도 발휘하였다. 이 중 어느 것이 원초적이고 본질적인가에 대해서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군사적인 측면의 비중이 보다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넷째, 화랑사상은 우리의 고유문화인 선교적인 원시신앙을 중심으로 외래 종교인 유․불의 교들과 융합하여 된 것이다. 이미 살펴 본 원광의 세속오계도 고유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의 五常과 五戒를 받아들인 것이므로 어느 一戒도 이것은 불교의 사상, 저것은 유교만의 사상이라고 구별할 수 없다.
다섯째, 화랑도의 지도이념이며 실천덕목으로서 세속오계는 三敎 조화사상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는 왕권 강화를 합리화해 주는 종교적인 면에서, 유교는 정치제도와 학문적인 면에서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째, 화랑도는 신라의 성공적인 교육제도였다. 화랑도의 교육방법, 교육과정, 교육장소 그리고 생활양식 등에서 높은 도덕성과 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 무사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이 청소년을 수련하고 인재를 발굴하려는 신라의 교육제도였으므로 신라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신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화랑정신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의병정신, 삼일 정신에도 이어져 왔다고 본다. 실로 화랑도 교육은 삼국시대 우리 민족고유의 교육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육사 전체의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특유한 교육방식을 준 것이다. 비록 외래사상이 조금 가미되기는 했으나, 화랑도 교육은 외래사상의 수용과 함께 곧 우리의 교육사상이나 교육방식에 맞게끔 습득 동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랑도교육은 우리 민족교육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인 만큼 순수한 우리의 대표적인 교육정신이요 교육사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화랑도의 교육사상을 검토한 결과 화랑도 교육이 현대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랑도 교육은 생활중심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필요에서 얻은 경험이 곧 지식이었으며, 생활습관을 경험하는 것이 지식이며 교육이었다. 무엇보다도 지덕체 혹은 지정의를 균형되게 계발할 수 있도록 생활중심 교육방법을 실시한 것이다.
둘째, 화랑도 교육이 여행, 소풍, 탐험 등을 통한 직관교육을 실시한 점이다. 화랑집단은 심신의 단련을 위해 소풍, 여행, 탐험 등을 한꺼번에 몇 백명 혹은 몇 천명씩 떼를 지어 실시하였으며 직관교육의 훈련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장교육 또는 극기훈련과 흡사한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화랑도 교육은 시대상황에 적응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랑들은 평시에는 문관으로, 전시에는 무인으로 조화로운 인간육성에 힘쓰면서 시가와 음악을 통한 정서교육과 함께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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