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금융위기과 JP모건
2.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1)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의 배경
모기지 대출은 원래 월가의 투자은행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아니었다. 소매금융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기지 대출은 과거 은행기관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980년대 까지 고정금리 모기지 대출상품이 판매되었다. 저축대출조합 파산사태로 인해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면서 1990년대 부동산 가격에 장기 정체현상이 나타났고, 모기지 대출도 당연히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98/9년 미국 서부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세를 보였다. 신경제 거품이 정점을 향해 달릴 때 부동산 시장도 덩달아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다시 활황을 보였다고 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남발된 것은 아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은 원래 Federal Housing Association(연방주택공사)에서 영세민과 퇴역군인을 대상으로 하여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고, 보통 금융기관들은 높은 대출위험 때문에 기피하던 대출상품이었다. 그동안 철저히 외면 받았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시장이 대형 금융기관들까지 참여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통화정책의 변화이다. FED는 2001년~2003년에 걸쳐 연속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2000년 신경제 거품이 붕괴하고, 설상가상으로 2001년에 9.11사태가 터지면서 극심한 정치적 불안과 함께 침체에 빠진 미국경제를 구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2003년 FED의 기준금리는 1.13%까지 내려가게 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인 셈이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남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내 집 마련 기회를 갖지 못했던 수많은 서민들을 상대로 한 모기지 대출이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이에 부동산 투기꾼들이 합세하여 주택건설 붐이 일고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된다.
두 번째, 고위험 자산으로만 치부되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상품이 고수익이 보장되는 투자 상품으로 인식되어 많은 투자가들이 몰리게 되었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복잡한 금융기법을 이용하여 MBS, CDO 등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의 신용파생상품을 만들어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 월가가 이루어낸 금융혁신의 핵심은 거래가 불가능한 대출상품을 거래 가능한 증권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과 자본시장의 변동위험을 회피하는 다양한 헤지기법이다. 월가가 개발해 낸 이러한 금융공학의 혁신 덕택으로 서브프라임 대출을 회피해 왔던 대형 금융기관들이 과감하게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고, 전 세계 투자가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영세민들을 상대로 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월가의 손을 거치면서 복잡한 모기지 채권 투자 상품으로 바뀌어 세계 금융시장의 최고 인기상품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월가의 금융혁신 : 서브프라임 유동화 증권>
월가가 중심축이 되어 돌아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시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모기지대출회사가 있다. 모기지 대출회사는 은행기관이 아닌 제 2금융권에 속하며 모기지 대출상품을 판매한다. 모기지 대출회사는 대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주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월가의 투자은행이나 대형 상업은행들이 이 채권을 매입한다. 모기지대출회사는 자금제공에 대한 대가로 모기지 대출 원금 및 이자상환 권리를 금융기관에게 넘긴다. 즉, 미국의 대표적 금융기관이 모기지 대출자금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한 탓에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모기지 대출회사를 직접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음으로 월가의 투자은행이나 대형 상업은행이 설립한 특별목적 회사인 유동화전문회사가 있다. 유동화 전문회사는 모기지 대출채권을 주택저당증권이라고 불리는 MBS로 바꾸어 자본시장에 거래가 가능한 유동화증권으로 만들어 낸다. 이 때 대형 금유기관들이 매입한 모기지 대출채권은 유동화 전문회사로 완전 매각되어, 대형 금융기관의 장부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를 통해 금융기관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채권의 부실위험으로부터 형식적으로 자유로워지고, 고위험 자산에 대한 자본금 적립부담을 털어낼 수 있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생상품의 경로
유동화 증권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라는 사람이 자기가 사려는 집을 담보로 30년 만기 100만 달러모기지 대출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일상적인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대출 금융기관은 30년이 흘러 100만 달러의 대출금 상환이 완료된 다음에야 그 자금을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 줄 수 있다. 즉, 만기가 되어 차입자가 대출자금을 상환하기 전까지 금융기관은 그 자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고, 30년 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이자수익을 얻을 뿐이다. MBS는 과거 주로 은행이 취급하던 전통적인 부동산대출상품을 자본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MBS는 부동산 담보대출을 다시 담보로 하여 발행한 증권이라고 보면 된다. 금융기관은 자산유동화전문회사를 통해 모기지 대출채권을 담보로 MBS를 발행하여 투자가에게 판매한다. 그렇게 되면 금융기관들은 모기지 대출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장기간 기다릴 필요 없이 단번에 목돈을 확보할 수 있다. MBS는 금융기관에게는 자본시장을 통한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으로 이용되고, 투자가들에게는 새로운 투자기회를 제공하여 서로가 득을 보게 된다. 이것이 자산유동화의 일반적 의미이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상품이 자본시장의 투자 상품으로 다시 태어난 형태인 MBS는 구조화 금융이라는 기법을 이용하여 또 다른 형태의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진다. 이를 부채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라고 한다. 부채담보부증권은 모기지 유동화증권뿐만 아니라 회사채, 신용카드, 자동차 매출담보증권 등 다양한 종류의 유동화 자산을 한데 엮고, 이를 또 다시 신용등급별로 조각을 내고 층위를 구성하여 디자인한 패키지 금융상품이며, 조각별로 나누어 사고 팔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신용 등급은 위 그림과 같이 나뉘어졌으며, CDOs는 특히 서브프라임 MBS 중에서도 메자닌 계층을 집중 매입하여 기초자산으로 편입하였고, 이는 전체 서브프라임 MBS시장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해주었다. 여기에 더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고위험에 대한 또 다른 안전판이 있다.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이라는 파생상품이 그것이다. 채권보증회사가 모기지 CDO를 보유한 금융기관에 수수료를 받고 판매하는 일종의 보험 상품으로 모기지 채권에 부실이 났을 때 채권보증회가가 대신 그 빚을 갚아준다는 계약이다. 채권의 부도위험 자체를 사고 팔수 있도록 한 투자 상품으로,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는 헤지펀드들에게 인기가 높다. 서브프라임 MBS가 복잡한 구조의 CDO 패키지 상품에 함께 섞여 포장되고, 이에 대해 또다시 채권 보증을 세워 전 세계 투자가들에게 판매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발행한 금융기관은 부실위험을 여러 가지 통로로 제 3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된다. 서브프라임 모시지 채권은 월가의 위험관리기법의 최고봉으로 인정받아 신용등급평가기관으로부터 최고의 신용등급을 받게 된다. 월가의 금융공학적 혁신과 신종 금융기법은 채권시장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과거 투자은행에서 천대받던 고정수익 채권업무가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바뀐 것이다.
* CDOs 기본구조
2)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표면화
모기지유동화증권 발행은 FED의 기준금리 인하에 발맞추어 2001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였고, FED 기준금리가 1.13%로 떨어진 2003년에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모기지 채권의 발행규모는 이미 2001년부터 국공채시장 규모를 능가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전체 발행채권의 45.5%를 차지하게 된다. 기타 자산유동화증권까지 포함한 유동화증권시장은 미국 채권시장의 최대주자가 되었다. 모기지유동화증권의 발행과 거래에서 발생하는 수수료 수입은 글로벌 금융기관들에게 최고의 돈벌이가 되었으며, 신경제 버블붕괴이후 증시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고 안전자산을 찾아 해매는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최고의 투자 상품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 자산 유동화 증권 신규발행
2001년 이후 모기지 채권시장이 정신없이 부풀어 오를 때 그 배경에는 ‘빚내기’ 정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시대가 열리면서 차입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기 때문
이다. 내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영세민들에서부터 모기지 채권을 정신없이 사들인 전 세계 금융기관가 헤지펀드에 이르기 까지 모기지 채권시장에 뛰어든 모든 이들은 빚더미를 늘려가며 시장을 키워나간다. 부동산 가격과 모기지 채권시장만이 부풀려진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신용카드, 자동차 매출채권 등 기타 자산 유동화 증권도 같이 달아올랐다. 이외에도 집값이 오름세를 지속하자 모기지차입자들은 빚내서 산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집을 담보로 또 다른 대출을 받는 것은 Home equity loan(가계자금대출)이라고 한다. 주택보유자에게 집이 마치 현금인출기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집값이 오르는 것을 보면서 차입자들은 늘어나는 빚에 대한 걱정을 뒷전으로 돌릴 수 있었고, 은행들도 별 거리낌 없이 대출을 남발했다. 가계소비의 고공행진을 유지하게 했던 다양한 소비대출 붐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경우 모기지 채권시장과 함께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2001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급증하며서 수백만에 달하는 서브프라임 차입자들에게 접근이 불가능했던 부동산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전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팽배해졌다. 서브프라임 대출 붐이 지속되면서 서브프라임 대출이자와 프라임 대출이자의 차이는 2001년 2.8%에서 2007년 1.3%까지 줄어들었고, 이는 또다시 서브프라임 대출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동산가격의 상승 기세는 2005년 여름에 정점에 도달한 후, 2006년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동시에 처음 2년 동안 저리의 고정금리가 적용되었다가 이후 고금리 변동글리로 재조정되는 변동금리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에 적신호가 나타났다. 2004/5년 FED가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모기지 대출금리가 상승하자 차입자들의 상환부담이 눈덩이 처럼 불어났다. 그 결과 2006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연체율과 강제차압건수사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이는 부동산가격 하락을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주택압류 비율 추이
모기지의 연체율 추이
2007년 상반기에 들어 대출부실로 인한 모기지대출회사의 파산사태가 줄을 잇는 가운데, 2007년 4월 제2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인 New Century Financial이 파산을 신청했다. 서브프라임 채권시장이라는 카드집의 가장 밑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말, 2007년 초 주식 및 부동산 가격거품에 대한 우려가 일부에서 제기되었으나,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던 거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동산 가격하락이 계속되고 강제차압건수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높고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져 유통시장의 현금흐름에 큰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서브프라임 채권시장의 축제분위기는 2007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8월 베어스턴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헤지펀드 2개에 대해 청산결정을 내리는데, 이것이 서브프라임 사태 발발의 신호탄이 되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대출부실이 드디어 이 시장을 주관했던 월가의 투자은행을 급습한 것이다. 그 이후 모기지대출 부실은 걷잡을 수 없는 들불이 되어 모기지 MBS/CDO시장으로 옮아 붙고, 이어서 채권보증시장인 CDS로 번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최고의 위험분산관리 기법으로 찬사를 받았던 월가의 금융혁신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악재로 변질되어 월가 전체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 주요 거대금융기관의 서브프라임 손실 (단위: 억달러)
회사 | 손실 규모 | 회사 | 손실 규모 |
메릴린치 | 25.1 | 리먼브라더스 | 3.3 |
시티그룹 | 23.9 | 도이체뱅크 | 3.2 |
UBS | 14.4 | 골드만삭스 | 3.0 |
모건 스탠리 | 11.7 | CIBC | 3.0 |
BOA | 8.2 | 와코비아 | 2.7 |
J.P모건 체이스 | 5.0 | 바클레이스 | 2.7 |
AIG | 4.8 | 베어스턴스 | 2.6 |
Credit Agricole | 3.6 |
자료; jennings(2008, p35)
2007 하반기 베어스턴스에 이어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BNP Paribas, Citi Group, UBS, 크레디트 스위스 등 내노라 하는 글로벌 투자은행들과 금융기관들도 자신들이 운영하는 모기지 채권투자 헤지펀드의 손실이 늘어나자 펀드의 청산, 환매중단, 자산매각을 시작하였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손실을 기록하는 모기지 채권 매각에 일제히 나섰지만 매입자를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모기지 채권 유통시장이 마비되어 채권가격이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신용등급평가기관은 모기지 채권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이는 채권보증업체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다른 한편에서 수익률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정신없이 모기지 채권을 매입했던 세계 곳곳의 최종투자가들은 하루아침에 투자금을 잃어버리는 꼴이 되었고, 금융주를 중심으로 주식시장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금융시장의 일대혼란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금융기관들은 서브프라임 손실이 어디에서, 얼마나 발생했는지를 가늠할 수 없는 희한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브프라임이 섞여있는 패키지 상품 내부가 너무 복잡하여 서브프라임 채권의 위험비용과 손실규모를 계산해내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들은 악몽의 2007년을 보내면서 손실규모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사태수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것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복잡한 모기지 채권에 대한 손실산정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발표된 손실액이 실제 피해액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로 어떻게 계산된 손실액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브프라임 부실로 인한 금융기관의 피해가 구체적인 액수로 표현되면서 서브프라임 사태는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3)미국 금융위기의 원인
* 금융 불안정 지수
미국의 금융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0년 전인 1907년도 미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수많은 은행들이 도산을 하고 기업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때에는 중앙은행조차 없었던 그야말로 정부가 해결할 능력이 갖춰져 있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위기를 겪으면서 극복할 수 있는 정부 내 기관을 갖추어 갔고 금융 산업을 더욱 발전 시켜 왔다. 1971년 브레튼 우즈체제의 붕괴는 미국의 금융시장 뿐 아니라 세계의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를 가져왔다. 이전 까지 1온스=35달러라는 정해진 고정 환율에 따라 움직였던 외환시장이 변동환율제로 전환 되면서 외환시장의 변동성은 경제상황 변화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위 표를 보게 되면 1970년 이후에 약 8차례의 금융위기가 도래 하였고, 이때 마다 미국의 주식시장은 폭락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90년대에 와서는 금융위기의 패턴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규제가 약한 영역에서 금융혁신에 따른 수익성 제고로 자산버블이 형성된 후 급속히 붕괴되면서 새로운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80년대에는 주식시장 2000년대에는 IT시장, 그리고 2007년에는 부동산 시장까지 금융혁신에 따른 수익성 제고로 자산버블이 형성된 후 다시 붕괴하는 과정에서 위기가 발생 하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적자, 국제수지 적자)와 저금리도 위기의 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2. 위기의 확산과 미국정부의 대응
1) 금융기관의 파산과 정부의 구제금융
신뢰가 최대자산인 금융시장에서 신뢰붕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자금난에 처한 금융기관들이 단기자본시장으로 몰려들면서 금리가 치솟아 오르고, 투자가들은 월가를 철저히 외면했다. 급기야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중동, 중국, 싱가포르, 국부펀드를 향해 구조요청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월가의 금융기관들에게 외국정부가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 이에 FED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2007년 말부터 연속적으로 기준금리와 재할인율을 인하하고 긴급유동성을 공급하여 신용경색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또한 2008년에 들어서서 금융시장 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정부는 일시적 경기부양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습책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FED의 긴급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부동산 가격하락으로 인한 실제 부도위험과 채권유통시장의 거래파트너 사이에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나타난 거래 상대방 위험(counterparty risk)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금융시장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을 뚫지는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로 달러화가치가 하락하자 안전자산을 찾아 해매는 전 세계 투자가들이 원자재시장으로 몰리면서 광적인 원자재 투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고, 투기로 부풀려진 원자재 가격은 세계 각국에서 인플레를 주도하며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제공하고 있다.
2008년 3월 중순 베어스턴스 부도사태는 금융 시장의 대혼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견뎌내고 85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미국 제5위의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베어스턴스 부도의 직접적 원인은 월가에서 나돌기 시작한 베어스턴스의 부도설이었다. 부도설이 나돌기 시작하자 베어스턴스의 거래파트너들이 거래를 일시에 중단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베어스턴스 부도설이 등장하여 실제로 무너지기까지 불과100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어스턴스 부도직후, 사실상 상황이 별반 다를 바 없는 월가의 다른 투자은행들 - 메릴린치, 리먼브라더스, 골드만삭스의 부도설이 떠돌았고 금융시장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에 놀란 FED가 개입하여 베어스턴스에 3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그 다음 날로 J.P Morgan Chase에 매각을 결정했다. 동시에 FED는 월가의 투자은행에게 총 400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발표하였고,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경우 무제한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이후 미국 금융당국은 8월 정부후원 주택금융기관인 패니매(Fannie Mae)와 프래디맥(Freddie Mac)에 약2000억 달러 상당의 구제 금융을 제공하기로 발표한다. 이러한 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급기야 9월 15일에는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였다. 그리고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440억 달러에 인수되었다. BoA는 당초 리먼브라더스의 유력한 인수자로 지목받았으나, 미국 정부가 리먼브라더스의 부실채권에 대한 보증이나 금융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리먼브라더스의 인수를 포기하고 방향을 메릴린치로 돌렸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메릴린치의 피인수는 작년 8월 이후 14개월여 간 지속된 신용경색으로 인한 손실 확대에 기인한다. 올해 상반기까지 메릴린치는 총 370억 달러, 리먼브라더스는 33억 달러를 상각했으나 신용경색으로 손실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결국 손을 든 것이다. 올해 1/4분기에만 리먼브라더스는 27.7억 달러, 메릴린치는 19.6억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하였다. 30배 수준의 높은 레버리지 투자로 인해 부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후 미국정부는 더 이상 경제전체의 위기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미국 최대의 보험사 AIG의 파산을 막기위해 300억달러의 자금을 투입하게 된다. 이후에도 끊임 없이 미국 정부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구제금융을 지원한다. 이러한 효과는 발표안이 날 때마다 시장에 즉각 반영되어 폭락한 주가를 안정화 시켜 주었지만 일시적인 방안이었을 뿐 실물경제 위기로의 확산을 막지는 못하였다.
11월10일 미국 2위의 가전제품 유통업체인 서킷시티가 자금난으로 파산 보호 신청을 해 미국의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이 몰고 온 실물경제의 타격이 현실화 되고 있다. 서키시티는 파산보호 신청과 관련, 34억달러의 자산과 23억 2000만 달러의 채무를 신고했다.
서킷시티는 기업회생 계획을 마련하면서 영업을 지속할 방침이지만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킷시티의 파산 보호 신청으로 업계에서는 경기침체에 따른 판매 부진 속에서 많은 소매 유통업체의 파산과 폐점이 잇따를 거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사인 제너럴 모터스(GM)또한 바람 앞의 등불 신세다. 3분기 적자가 25억4,000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미국과 세계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비틀 거리고 있다. 미국 자동차 제조 3위 업체인 크라이슬러와의 합병 협상도 유동성 위기로 중단된 상태다. 기업 회생을 위해 정부의 금융지원에 목을 매고 있지만 상황은 GM경영의 난맥상을 들어 파산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미국은 지금 GM의 운명을 두고 구제론과 파산론으로 들끓고 있다.
이러한 기업들의 지속되는 적자와 더불어 기업의 위축은 고용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금융업계는 각 수천명에서 수만명의 인원감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시티그룹은 내년까지 총 5만 2천명을 감원하기로 했다. 또한 JP모건과 골드만 삭스는 전체직원의 10%이상을 감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2)미국 대응의 한계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의 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9월말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 금융안을 국회에서 상정할 때에도 하원의원들의 반대로 통과하지 못할 뻔 하다가 가까스로 통과 했던 것을 보더라도 월가의 무제한 적인 구제 금융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미국민들이 좋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가의 고수익 고위험을 노린 위험한 투기의 대가를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데에 반발이 많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미국의 경제논리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구제 금융을 하는 것은 월가가 이번 위기에서 무너질 때의 여파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3개의 금융사가 무너지고 최대의 보험사 AIG의 부실이 아직 잠재워지지도 않았다.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나고 더 많은 자금이 투입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 모두가 영향을 받고 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파산 위기에 놓여있고 살아남기 위해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단행 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G-20 정상회담을 통해서 국가차원의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여러 방안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 까지는 구체적인 사안이 나오고 있지 않아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위기 확산에 따라 새로운 통화체제의 필요성이 되두되면서 신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신브레튼우즈란 국제금융 규제를 강화하고 미달러화 이외의 대체통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새로운 국제금융 질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의 전환에 대해 각국은 서로 다른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기존 체제안을 원하고 있다. 이는 기존 금융질서 내에서 시장의 투명성을 확대하고 국제금융감독기구의 사전 예방 및 사후 감독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프랑스 등 유럽이 지지하는 새로운 통화체제 구축안이 있다. 이는 헤지펀드와 신용평가회사에 대한 좀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달러와 유로화 같은 국제통화에 대한 재검토등도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IMF와 세계은행 총재 등 브레튼우즈 기구의 장을 보다 개방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통해 선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달러에 기반을 둔 세계 금융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통화 사용을 통해 국제 통화 시스템을 안정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IMF 등에서 신흥시장국의 위상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각국의 입장 차이를 고려할 때, 새로운 금융질서가 당장 구체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거 브레튼우즈 체제도 4여년 동안 준비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4. JP모건의 대응
1) JP모건의 역사
① 초기역사
회사의 역사는 Junius S. Morgan이 1854년 런던의 George Peabody가 소유한 은행 사업에 뛰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소유한 은행 사업에 뛰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Junius S. Morgan은 George Peabody & Co. 의 경영권을 잡고 회사명을 J.S. Morgan & Co. 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Junius의 아들인 J. Pierpont Morgan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그 이후 JP Morgan & Co. (이하 JP모건) 이라고 사명을 바꾸었다 JP모건은 처음에는 1871년 Drexel, Morgan & Co. 라는 이름으로 J. Pierpont Morgan 과 Anthony J. Drexel이 함께 뉴욕에서 설립하였다. 새로운 상업금융의 동업관계는 초기 유럽인들의 미국 투자의 투자 운용가로서 역할을 하였다.
② 모건 왕국 시대
1895년 Drexel, Morgan & Co.가 JP모건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미국 철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을 Andrew Carnegie와 여타 경영자들에게서 인수하였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10억 달러 대의 회사가 되었다. 1895년 JP모건은 미 정부에 6천 2백만 달러 상당의 금괴를 지원하면서 유동성 지원 및 1조 달러의 재무흑자 유지에 기여하였다. 1982년 회사는 New York, New Haven and Hartford Railroad에 자금조달을 하면서 몇 번의 합병을 단행하였고 미국 뉴 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대표적인 철도 회사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1914 년에 완공된 월 스트리트 23번가는 “The Corner”로 혹은 “The House of Morgan” 으로 불렸으며 그 후 수십 년간 JP모건의 본점은 미국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그러던 1920년 9월 16일 12시 정오 본사 입구에서의 폭탄 테러로 38명이 사망, 400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폭탄테러가 일어나기 직전 테러에 대한 경고메모가 Cedar Street and Broadway에 잇는 우편함에 남겨졌다고 한다. 그 메모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더 이상 좌시하지 안을 것을 기억하라. 정치범들을 석방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미국 무정부주의 투사-” 이 월 스트리트 폭탄테러사고의 배후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자행했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FBI는 20년간의 수사 끝에는 결국 1940년 범인을 찾지 못한 체 사건을 종결 시켰다.
1914년 8월 모건의 경영 파트너인 Henry P. Davison 이 영국 중앙은행과의 거래를 위해 영국을 방문한다. 거래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 발행하는 전쟁 채권의 재정 보증을 JP모건이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중앙은행과 JP모건은 서로 재무대리인의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JP모건은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회사들에 주로 투자를 하였다. 그러므로 JP모건은 영국, 프랑스 두 정부의 재정 및 지출 활동 양쪽에서 수익을 챙기는 셈이 되었다.
③ Glass-Steagall Act와 Morgan Stanley
1930년대에 JP모건 그리고 JP모건과 합쳐진 미국의 종금사들은 Glass-Steagall법에 따라서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기능을 분리하게 된다. 여기에서 JP모건은 상업은행기능을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대공황 이후의 시기까지만 해도 상업 대출이 더 수익이 좋고 한층 수준 높은 사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JP모건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면 회사가 유가증권사업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분리된 은행을 재결합 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1935년에 유가증권 사업이 금지된 후 1년여가 지났을 때 JP모건의 경영진들은 투자은행 기능을 분할하기로 하였다. JP모건의 파트너인 헨리 모건 (잭 모건의 아들이면서 J. 피어폰트 모건의 손자) 과 해롤드 스탠리는 1935년 9월 16일 6백 6십만 달러를 들여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를 JP모건 경영진들에게서 사들여 Morgan Stanley (이하 모건스텐리)를 설립하게 된다. 설립초기 모건스텐리는 JP모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월 스트리트 2번가에 자리 잡았다. 모건스텐리 직원들은 일상적으로 거래결제를 위해서 23번지 JP모건 빌딩을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다.
④ Morgan Guaranty Trust
분사가 된 이후 모건스텐리의 유가증권사업은 날로 번창한 반면 JP 모건은 침체되어 있었고 1950년대와서는 그저 중간 사이즈의 은행이었다. 은행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 1959년 JP모건은 뉴욕에 잇던 Guaranty Trust Company를 인수하여 Morgan Guaranty Trust 를 만들었다. 두 은행의 수많은 연관성과 상호 보완적 특성에 의해서 JP모건은 높은 지명도와 지위가 높은 고객들과 금융가 인재 풀을 갖고 있었고, Guaranty Trust는 다량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1959년 합병 당시 Guaranty Trust가 JP모건의 거의 4배 크기가 되었다고 하여도 새로 창립된 Morgan Guaranty Trust는 근본적으로 JP모건의 사원들에 의해 경영되었고 JP모건이 Guaranty Trust를 산 것처럼 인식되었다.
⑤ J.P. Morgan의 귀환
비록 합병이후 10년이 지났어도 - Morgan Guaranty는 JP모건이라는 이름 하에 금융지주 회사를 설립하려 하였다 - JP모건이라는 이름 아래로 다시 돈아오기 전까지 198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은 Morgan Guaranty 라는 이름으로 계속 운영되었다. 1988년 회사는 다시 한번 JP모건 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게 된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JP모건은 다른 상업은행들과 함께 신문 지상에 선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투자금융(investment banking) 상품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1989년 연방준비은행은 JP모건이 상업은행으로써는 최초로 corporate debt offering을 보증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허가했다. 1990년대 JP모건은 재빨리 투자은행으로써 재건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 JP모건은 5대 증권 보험사로써 발돋움 하게 된다.
⑥ J.P. Morgan Chase
1990년대 후반 JP모건은 규모는 크지만 그렇다고 주도적인 영향력은 없는 상업 및 투자 은행이었다. 매력적인 JP모건이라는 브랜드 지명도와 함께 부채 및 주식 유가증권 보험업의 튼튼한 기반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회사였다. 1998년이 되면서 JP모건은 합병의 가능성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기 시작 하는데, 이때 유력한 인수자로 거론된 회사들에는 Goldman Sachs, Chase Manhattan Bank, Credit Suisse, Deutsche Bank, AIG 등이 있었다. 2000년에는 90년대 몇 번의 합병으로 인해서 미국의 최대 규모 상업은행 중 하나가 된 Chase Manhattan Bank 는 투자은행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환골탈태라고 불릴 만한 합병을 한 번 더 계획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13일 Chase Manhattan Bank는 JP모건을 309억 달러에 인수한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Gramm-Leach-Bliley 법이 회사의 합병 1년 젂에 발표되어 이것이 Glass-Steagall 법을 무효화시키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합병이 합법화 되었다. 이 때문에 JP모건과 Chase Manhattan Bank의 합병도 가능해진 것이었다. 합병 이후 JP모건 체이스는 미국과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은행들 중에 하나가 되었으며 사업 영역으로는 투자금융(IB), 상업금융(CB), 소매금융(RB), 자산관리(Asset Management), 개인금융(PB) 그리고 사모투자(Private Equity) 사업 등을 다루고 있다.
2) JP모건과 미국경제
<미국 최초의 군산복합 재벌>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 1856년 금융계에 진출한 모건은 얼마 뒤인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맡았다. 이에 그는 그해에 즉각 아버지 곁을 떠나 뉴욕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투자은행 ‘JP모건상사(J.P. Morgan & Co.)'를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동시에 화약 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최대의 무기상 ’뒤퐁(Dupont)'과 손잡고 총기류와 군화 등을 취급하는 무기 중개업자로 나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었다.
뒤퐁은 그 뒤 JP모건과 함께 ‘제너럴 모터스’의 주식을 공유하는가 하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 모건과 손잡고 대량으로 무기를 공급하는 등 모건과 충실한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다.
모건은 당시 '악덕상인'으로 악명 높았다. 그는 남북전쟁 과정에서 격발사고가 잦은 불량 총기류와, 새로 배급받아 갈아 신고서 반나절도 행군하지 않아 밑창이 떨어지는 불량 군화 등을 비싼 값에 군납해 장관이 경질되는 등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회의 진상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밑천으로 1864년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은행까지 JP모건 상사에 합병시켜 오늘날과 같은 대형 투자은해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JP모건시대가 본격 개막한 것이다.
<철도-통신산업 장악>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전쟁특수’가 사라지자 모건이 눈을 돌린 곳은 철도-통신사업이었다. 40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대륙 간 횡단철도가 개통된 1869년 이후 철도사업은 각종 파생적인 부가가치를 낳는 고수익 사업으로 급신장하는 중이었다. 특히 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통신망이었다. 아직 전화가 개발되기 전인 그 무렵 주된 통신망은 전신이었다.
그런데 서부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 전신소가 위치한 곳은 다름 아닌 전국의 철도망에 점점이 박혀 있는 철도 역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융인에게는 빠른 정보가 곧 돈을 의미했다. 때문에 은행이 철도업을 장악하면 자동적으로 전신망도 장악해 생생한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었고, 이 같은 정보는 곧 돈으로 이어졌다.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 모건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공격방향을 잡은 모건은 곧바로 철도업에 뛰어들어 200여 개나 난립했던 철도회사 가운데 소규모 회사를 매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철도회사를 상대로 기업 인수합병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이르러 모건의 철도재산은 30억 달러로 부풀었고, 그는 미국의 4대 철도업자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철도왕’이라 일컬어지던 미국 최대의 철도업자 윌리엄 밴더빌트와 힘을 합쳐 미국 굴지의 전신회사이던 ‘웨스트 유니언’사를 집어삼키는 데 성공했다. 철도사업에 뛰어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에디슨 활용해 부 팽창하고 철강산업 장악도>
그런데 웨스턴 유니언사를 사들인 모건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들어왔다. 무명의 전신기사에 불과하던 토머스 에디슨이라는 젊은이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에디슨은 훗날 ‘발명왕’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에디슨은 입사 후 자신의 발명품을 잇달아 회사에 쏟아 내놓기 시작했다.
모건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에디슨의 높은 상품가치에 주목한 모건은 비밀리에 거금을 투자해 ‘에디슨 전등’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다음 JP모건사를 대주주 겸 주거래은행으로 만들어버렸다. 모건의 예상대로 얼마 뒤 에디슨은 세기적 발명품인 전등을 발명해냈고, 미리 대주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건은 엄청난 돈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모건은 또 벨이 발명하고 에디슨이 실용화시킨 전화 사업에도 재빨리 손을 대 ‘제너럴 일렉트릭’을 설립하여 전화시장마저 삼켜버리는 등 평생 동안 1,000여 개의 발명품을 쏟아낸 에디슨을 철저하게 활용하여 부를 부풀려나갔다. 모건은 ‘세계 최초의 영악한 벤처 캐피털리스트’였던 셈이다.
모건의 확장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소유이던 ‘카네기제강’을 그때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던 5억 달러에 군말없이 사들인 다음 이를 다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페더럴제강·내셔널제강·아메리카제강 등과 합병시켜 ‘U.S. 스틸’이라는 미국 최대의 ‘철강공룡’을 만들어 순식간에 미국 철강업계를 장악했다.
미국 철강시장을 완전 독식하다시피 한 U.S. 스틸의 주가는 모건이 카네기제강을 매입했을 시점보다 몇 배나 폭등해 모건은 며칠 만에 매입가격의 배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모건은 기업 인수합병의 귀재이기도 했다.
<공황때 혼자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사나이>
모건이 팽창을 거듭하던 1907년, 미국에서 대규모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이해 들어 9개월 동안 자그마치 8,000여 개의 기업이 쓰러지고, 주가는 대폭락하였다. 이것은 그때부터 20여 년 뒤에 발생한 1929년 세계대공황과는 비교가 안될 ‘일국(一國)차원의 공황’이었다. 그러나 ‘천민 금융자본주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의 금융산업이 받은 충격은 붕괴 직전의 엄청난 것이었다.
그 무렵의 미국 금융 산업은 전당포 수준이었다. ‘금융기관=은행’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금융의 1차 산업’ 격인 은행이 여수신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기 이전 미국 전역에는 크고 작은 2만 5,000여 개의 은행이 난립하고 있었다. 또한 통화와 신용의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나 은행의 건전성을 상시적으로 감시 감독할 수 있는 금융 감독 당국도 존재하지 않아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전에 경보를 울리거나 유동성을 조절할 수 없었다.
금융기법도 형편없어서 모든 대출이 담보대출이었지 신용대출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30년 만기 주택할부금융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보 없이 급전을 빌리려는 개인은 살인적인 고금리를 요구하는 전당포로 가야 했다. 또 오늘날과 같은 예금보호제도도 전혀 없었고 증권 등에 대한 건전성 규제도 없었다.
1907년 연초부터 위태롭던 뉴욕 금융시장은 마침내 10월에 들어 주가가 폭락하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주가 폭락의 여파로 머컨다일 내셔널 은행이 문을 닫는 것을 시작으로 도산하는 부실 은행이 속출하면서 모든 은행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고객 돈을 갖고 주식투자를 하던 투자신탁회사들이 무더기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최근의 월가 위기와 흡사한 최악의 위기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연히 예금자들이 은행과 투신사 앞에 장사진을 치는 인출사태가 벌어졌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조차 돈이 떨어져 주식거래를 중단해야 할 궁지에 몰렸다. 돈 많은 갑부나 은행 소유자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우리만이라도 은행에서 돈을 빼지 말자”고 결의했으나, 회의가 끝난 뒤 한두 시간도 채 안되서 서로 앞다투어 돈을 빼내가는 극도의 혼란상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댔다.
내로라 하는 뉴욕 금융가들을 모아놓고 모건이 맨 처음 착수한 작업은 투신사와 영세은행의 구제였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투신사와 영세은행들로 하여금 담보를 내놓도록 하고, 그 대신 대형은행들에게는 투신사에 대한 대출을 지시했다. 동시에 정부에 압박을 가하여 국립은행과 국립은행의 거래은행에 대해 구제금융을 지원하도록 했다.
자금부족으로 영업중단 위기에 처한 뉴욕증권거래소에 대해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증권거래소의 딜러와 증권사들은 평소 연리6%의 조건으로 하루짜리 콜자금을 써왔으나, 금융 경색이 극심해지자 100% 금리로도 자금을 빌릴 수 없었다. 모건은 여러 은행에서 10% 금리 조건으로 긴급자금을 모아 제공함으로써 주식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를 막았다.
이처럼 모건이 정부를 대신해 한 달여 동안 불철주야로 금융계를 재조직해낸 결과, 11월 들어 파국 일보직전까지 갔던 금융위기가 비로소 진정되었다. 모건의 혼자 힘으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것이다. 이로써 금융계에서 차지하는 모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인가가 만천하에 입증되었으며, 모건의 위상은 더욱 반석 같아졌다.
1907년 금융공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금융위기 이후 “모건이 우리의 금융위기를 영원히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내은행들이 재무부 지시를 다라 채권을 발행하여 현금부족을 막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해 통과시켰고, 의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를 비롯해 12개 국가금융기관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은행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전쟁상인 JP모건>
잭 모건이 선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다음해인 1914년, JP모건에게 또다시 대도약의 계기가 왔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자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잭 모건도 선친 못지않은 동물적 후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선친이 남북전쟁 과정에서 떼돈을 벌었듯, 잭 모건도 제1차 세계대전을 축재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미국은 전쟁 초기에 국내 반발여론을 명분으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후방기지로서 무기 공급을 맡았다. 몸은 다치지 않고 부수익만 챙기겠다는 ‘엉클 샘’의 약은 상술이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JP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5월에는 프랑스가 그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 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뒤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우고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유럽연합군이 대부분의 탄약을 미국에서 공급받은 까닭에 뒤퐁의 화약 생산량은 자그마치 전쟁 전의 26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같은 과정에서 JP모건은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다. 이 전시자금 조달을 자임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잭 모건이었다.
그는 ‘자유채권’이라 이름 붙여진 전시공채를 발행했다. 동시에 평소 영화 제작비를 공급해주던 까닭에 자신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할리우드의 찰리 채플린 등 유명 배우들을 선정요원으로 총동원해 이 채권을 국내외에 불티나게 팔아치웠다. 제1차 세계대전 5년 동안 모건이 이런 식으로 조성해 연합군에 빌려 준 돈은 10억 달러의 거금이었다.
또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기도 했던 모건은 이 기간 중에 뒤퐁 등에서 사들인 군수물자 30억 달러어치를 연합국에 공급했다.
JP모건은 이 과정에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높은 수수료를 챙기는 동시에,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동업자인 뒤퐁과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에게서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비싸게 사들이는 수법으로 이중삼중으로 부를 불려나갔다.
전쟁과정에서 큰 이익을 올린 JP모건은 그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 공신력의 은행으로서 전시공채 등 위험성이 큰 ‘정크본드(junk bond:투자 적격 신용등급 이하의 채권)’ 판매 중개에 적극 나섰고, 그러는 과정에 개발도상국이던 일본 이탈리아 벨기에 들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JP모건이 1차 세계대전때 유럽을 상대로 전시채권을 팔았다는 사실은 단지 JP모건이 떼돈을 벌었다는 의미 이상의 중차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런던금융시장이 쥐고 있던 세계금융 패권이 급속히 미국 월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월가 패권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금융파워가 다름아닌 JP모건이었다.
<JP모건,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기업의 40% 장악하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세계대공황이 일어났다.
U.S. 스틸, 제너럴 일렉트릭, ATT 등 JP모건을 중심축으로 하는 모건 그룹도 주가가 폭락했다. JP모건 그룹도 공황 초기엔 내수경제가 붕괴된 까닭에 3년 동안 법인세를 납부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의 파괴력은 가공스러웠다.
공황이 가장 극심했던 1929J년부터 1933년까지 4년 사이에 2만5천개의 은행 가운데 9천개가 쓰러졌다. 도산하지 않은 은행의 고객들도 앞다퉈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 장롱 속에 숨겨두는 이른바 ‘현금퇴장’사태가 일어났다. 은행들도 자신감을 완전 상실, 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목격되고 있는 지독한 ‘신용경색’이 발생한 것이다.
금융이 막히자 제조업의 양대축으로 고용효과가 가장 큰 건설업과 자동차업계의 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공황 전에는 260여만 명이던 실업자 수가 공황이 정점에 달했던 1933년에는 1천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JP모건에게 대 팽창의 기회였다. JP모건은 공황으로 쓰러진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빨아들였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어느 정도 공황의 충격이 가라앉은 1930년대 중반의 JP모건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기업으로는 자산규모가 1억 달러 이상이던 초대형 기업만 해도 ‘JP모건’과 ‘퍼스트 내셔널 뱅크 등 은행 14개, 생명보험회사 4개, 제너럴일렉트릭(GE)과 ATT 등 전기 전화 가스 등 공기업 8개, 철도회사 4개, U.S. 스틸 등 자동차 철강 제조업체 12개사에 이르렀다. 여기에 공황때 흡수한 중견기업까지 합하면 JP모건 산하의 기업체 수는 440개사였으며, 자산총액은 77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상장기업 200개사의 자산총액 가운데 40%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다. 미국 부의 40%를 한 손에 움켜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JP모건 더 팽창>
공황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JP모건에게 더 큰 축재의 기회가 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대규모 신규수요를 갈망하던 시점에 독일의 유럽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재미를 보았던 JP모건 등이 내심 쾌재를 불렀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JP모건은 1차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전시공채 판매 등을 통해 부를 눈덩이처럼 불려나갔다.
미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중 쏟아 부은 전비는 모두 2천45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 발발전 미국 정부의 50년 예산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전비는 대부분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조달되었으며, 미국이 발행한 전시공채의 절반 이상을 JP모건사이 독식하며 엄청난 액수의 수수료를 챙겼다.
전쟁때마다 JP모건의 부는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이다.
<JP모건의 독주를 막아라>
그러나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는 법. 다수 국민이 공황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과정에 나날이 통제불능의 거대공룡이 돼가는 JP모건은 사회의 공적이 됐다. 권력을 얻은 대신 존경을 상실한 것이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잭 모건 회장은 여러 차례 괴한의 습격을 받고 JP모건 사옥에는 사제폭탄이 투척될 정도로, 미국 최대 금융-산업 복합재벌인 JP모건에 대한 미 국민의 증오는 정점에 달했다.
국민의 분노가 빗발치자 정치권이 나섰다. JP모건을 방치했다가는 체제위기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치권은 JP모건 견제를 본격화했다.
정부와 의회는 먼저 1933년에 글래스와 스티골 의원이 공동발의한 금융독점 방지법인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이라는 칸막이법을 제정해, 은행-증권업이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겸업을 금지시켰다. 동시에 이미 겸업을 하고 있던 기존의 금융기관들을 강제 분리시켰다.
금융감독도 크게 강화해 1934년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창설, 주가조작과 허위정보의 유포를 감시하고 정보공개를 의무화했다. 또한 은행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연방정부는 은행 신설과 점포 확장을 철저히 봉쇄했고, 뉴욕증권거래소도 강제적으로 고정수수료 체제를 도입했다.
JP모건이 당연히 금융개혁의 주 타깃이었다.
정부는 글래스 스티걸법에 의거해 JP모건사에서 증권 등 투자업무을 맡고 있던 부서를 ‘모건 스탠리’라는 이름으로 강제 분리시켰다. 최근 월가 공황속에서도 살아남은 투자은행 '빅 2' 중 한 곳이다. 모건 스탠리는 JP모건의 손자뻘 되는 금융회사인 것이다.
모건 스탠리를 강제분리하면서 JP모건은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 투자를 전혀 할 수 없고 여수신 업무등 상업은행 영업만 해야 했다. 외형상 JP모건의 일대위기였다.
<초법적 존재>
JP모건은 이 모든 제도적 제약을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JP모건은 상업은행이 된 다음에도 다른 상업은행과는 달리 지점을 내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와 은행, 대기업, 소수의 부유층 백인 고객만 상대하는 종전의 ‘귀족주의 영업전략’을 구사, 변함없는 금융파워를 과시했다.
JP모건은 핵심 고객에게는 자사 주식을 시세 이하로 살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하는 ‘JP 모건사 특권자 명부’를 만들어 고객을 관리해 나갔다. VIP 마케팅으로 투자은행 업무를 금지시킨 법을 무력화시키면서, 수면 밑에서 부를 계속 불려나간 것이다.
실제로 다른 일반 상업은행들은 예대마진을 주된 수입원으로 하는 영업행위에 만족해야 했던 것과 달리, JP모건만은 수익의 대부분을 정부와 우량대기업 및 은행에 대한 대규모 대출, 증권발행 주선, 외환이나 기타 금융상품의 거래업무 등에서 얻었다.
JP모건은 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초법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정부는 전쟁채권 발행 등 생명선이 걸린 모든 업무를 JP 모건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 대통령선거 때도 JP모건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3) 2008년 현재
지난 3월 베어스턴스가 쓰러져 월가가 패닉 상태에 빠지자, 즉각 베어스턴스를 인수해 시장을 진정시켰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AIG마저 휘청되자 미정부는 즉각 JP모건에게 AIG인수를 간청 했으나 “이번 위기는 그렇게 수습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미정부에게 즉각 AIG를 국영화할 것을 조언했다. 또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한 직후인 9월15일 1천 380억달러의 막대한 자금을 리먼 브로커-딜러 부문에 지원하기도 했다.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뉴욕연방은행의 SOS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최근 워싱턴 뮤추얼 은행부문을 인수하면서 씨티그룹을 제치고 미국을 대표하는 은행으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 전역에 걸쳐 2300여개 지점을 둔 워싱턴뮤추얼을 통해 소매금융 부문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JP모건의 인수합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JP모건 측에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인수 합병을 통하여 JP모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그에 따른 잠재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5. 결론
초기의 금융은 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그 덩치가 커지면서 거대자본이 산업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쌍둥이적자(재정적자와 국제수지적자)를 안고 있는 미국은 금융을 통하여 그 적자분을 메우고 세계경제의 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파산 하거나 매각된 미국의 거대투자은행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어느 국가의 투자은행들도 따라잡을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만약 이러한 부실사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발생된 것이었다면 아마 그 나라의 경제는 붕괴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제통화가 달러이고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인 미국이기 때문에 쉽사리 무너지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100여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에서는 금융 위기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특히 8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몇 년 간격으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그 때마다 미국은 금리 인하를 단행 하였고, 월가의 금융사들을 구제해 주었다. 물론 그 당시 상황에서 그러한 방안이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미국정부의 지원이 월가의 방만한 운영을 동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는 저금리 기조이고 더 이상 기존의 방법으로는 원하는 수익을 얻을 수 없었던 금융사들의 선택은 고수익을 위해 고위험자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동안 이용해온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 파생상품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금융 상품의 맨 처음에 돌아가 처음의 자산에 부실화가 생기게 된다면 그와 해당된 시장에 퍼진 수많은 파생상품들은 모두 부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요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이 이것인 것이다. 금리 인상과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인하여 1차시장이 부실이 오자 2차 시장에 그 여파는 배가 되어 온 것이다.
모든 금융사가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그나마 JP모건이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철저히 경제상황을 지키고 검증을 했다는 것에 있다. 위기가 발생하기전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인식한 JP모건사는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중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예상은 맞았던 것이다.
이번 위기에서 JP모건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업입장에서도 사업 확장의 좋은 기회가 되었고 산업 전반에 걸쳐서도 파산 위기에 놓인 기업을 인수를 하여 시장 안정에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JP 모건은 현재의 인수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인수가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경기침제를 최소 1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한 가운데 JP모건사의 고용감축이나 구조조정은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요번 미국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의 무제한적인 구제 정책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JP모건의 기업 인수에 대한 입장에도 많은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요번 대선 결과는 오마바의 승리로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되었다. 지난 부시 대통령 시절의 어려웠던 경제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던 미국민들의 바램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세계화가 확산된 지금 미국 한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G-20회담을 통해서 많은 나라들이 지금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디플레이션의 기조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위기에서 모두가 잘 될 수 있는 방안으로 또다시 이러한 위기가 오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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