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누구인가요?
- 김유신 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
증조부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
- 구해왕 : 가락국의 제 10대 왕(재위 521 ~ 532년)
아버지는 대량주도독을 지낸 서현.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의 딸 만명.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
- 김유신의 업적 (백제, 고구려 정벌-1)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 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승리로 이끔.
641년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김유신의 업적 (백제고구려 정벌-2)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과 염종을 진압. 그해 10월에는 백제군을 격퇴.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 • 진춘 • 천존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격파.
그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
-김유신의 업적 (삼국통일)
654년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고전 끝에 물리친 뒤 소정방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킴.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꾀하자 인문•천존•죽지 등과 함께 물리침.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맡음.
리더로서의 자질
○ 결단성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한 김유
신은 자신을 태운 말이 술집 문앞에 가서 멈추자 말의 목을 베어 버
렸다. (일화-1)
승리로 이끄는데 밑거름.
※
리더로서의 자질
2. 자립성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일화-2)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리더로서의 자질
3. 자신을 다스린 자세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일화-3)
자신을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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