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대한 초간단 소개:주민,언어,종교,역사,정치,군사,경제,사회,한국과 관계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있는 나라.
위치 : 북아메리카 대륙
면적 : 962만 9091㎢
인구 : 2억 8760만 2000명(2002)
인구밀도 : 30.2명/㎢(2002)
수도 : 워싱턴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영어
통화 : US 달러($)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5040달러(2000)
(주요내용)
면적은 962만 9091㎢, 인구는 2억 8760만 2000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30.2명/㎢(2002)이다. 정식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수도는 워싱턴이다. 통화는 US 달러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3만 5040달러(2000)이다.
본토 48개주와 알래스카․하와이 2개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온대 주요부를 차지하며, 50개주와 1개 수도구(컬럼비아구:약칭 D.C.) 외에 해외속령(海外屬領)으로 푸에르토리코․사모아제도(諸島)․웨이크섬․괌섬과, 국제연합(國際聯合)의 신탁통치령(信託統治領)인 캐롤라인제도 등을 보유한다.
동쪽의 대서양 연안에서 서쪽의 태평양 연안까지 걸쳐 있는 국토의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4,500km나 되어 4개의 표준시간대로 구분된다. 미국은 독립한 지 200여 년에 불과하지만 건국이래 자유와 평등을 표방하여 근대국가로서는 가장 오래된 성문헌법(成文憲法)을 갖는 등 근대사에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본토의 대부분이 온대에 속하는 데다가 광대한 평야는 농목업의 발달에 적합하여, 세계 제2위의 농업생산국을 이룬다. 석탄․철광․석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자원을 개발하여 공업화를 이룩한 선진공업국이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모두 전승국(戰勝國) 쪽에 가담하여 물자와 자본의 공급국으로서 방대한 자본축적에 성공, 산업자본주의국가의 지도국가 지위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량생산․대량소비를 미덕으로 보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하였다.
이것은 동양의 정신문명과는 매우 다른 화려한 물질문명으로, 세계사를 통하여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미국에서 창조된 새로운 문화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진영의 지도국이라는 자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여러 다른 나라, 특히 개발도상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지원을 강화하였으며, 한국전․중동전․베트남전 등을 지원하였다.
1. 주민
1) 주민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할 당시 원주민인 인디언은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무렵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집단(移民集團)은 로마 가톨릭계의 에스파냐 사람들이었다. 에스파냐인(人)은 주로 미국의 남서부에서 멕시코 이남의 중남미에 걸쳐 거주하였으나, 그들 지역의 일부가 19세기에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미국 남서부에서는 에스파냐계의 영향이 다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볼 때 가톨릭의 세력은 미미하였으며 초기의 대량 이민집단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북서유럽의 백인이었다.
동부의 영국계, 미시시피강 유역의 프랑스계, 서부의 에스파냐계 이민이 각각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동부의 영국식민지가 독립 이래 오늘까지 국가발전의 중추부를 이루어 왔다. 그 동안 남부농업지대에는 노동력(노예)으로서 아프리카 흑인이 대량 이입(移入)되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부터는 아시아로부터의 이민도 증가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구상의 모든 인종․민족이 뒤섞여 있는 특이한 복수민족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 현재 미국의 인종구성은 백인이 71.3%로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흑인이 12.2%, 원주민이 0.7%, 아시아계가 3.8%, 히스패닉이 11.9%이다.
1860년 이래 약 100년 동안에 주민의 구성은 크게 변화하였다. 첫째 변화는 프런티어전선(前線)이 서쪽으로 뻗어 감으로써 인구가 점차 서부로 퍼져간 점이다. 이는 이미 에스파냐로부터 매수하였던 남서부의 지역과 더불어 태평양 연안의 새로운 주의 발전이나, 서부의 인구증가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둘째 변화는 상대적으로 동부유럽․남부유럽으로부터 이민이 증가하고 북부유럽․서부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줄어든 점이다. 동부 및 남부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가난한 데다가 저임금․미숙련 노동자였기 때문에 노동조합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민의 변천은 1860년~1900년의 40년 동안에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게다가 출신국의 수가 늘어 주민구성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셋째 변화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비롯한 것으로 동양인 이주자들이 늘어난 점이다. 그들은 프론티어의 서진(西進)에 따른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저임금 노동자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백인노동자를 압박하고 백인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추는 구실을 한다고 해서 동양인이 많은 태평양안에서는 심한 압박을 받아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술한 둘째 변화와 복잡하게 얽혀 1924년 이민을 제한하는 할당제 이민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40~1970년의 인종구성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백인의 비율이 저하되고, 유색인종의 비율, 특히 일본인, 중국인 등 아시아 인종의 증가가 두드러지게 되고, 흑인을 포함한 인종문제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2) 언어
미국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앵글로색슨문화로 언어도 백인과 흑인 모두 영어로 통일되어 있으며 법률적으로 정한 바는 없다. 그러나 히스패닉계(係)는 대다수가 에스파냐어(語)를 사용하며 그밖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중세 유럽의 문예부흥기, 종교개혁 등을 경험하였으므로 자본주의 발흥기의 근로정신에 투철하며 독립심과 진보적 정신,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인 발전과 함께 언어는 발음이나 단어 등 본래의 영어와는 좀 달라진 것도 있어 ��미국어��라고 할 때도 있다. 지역에 따라 방언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서부와 남부의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이다. 중남미지역의 이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에스파냐어 억양이 섞인 영어, 이탈리아인(人) 거리와 차이나타운에서도 독특한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사용한다. 뉴욕지방의 영어는 일반적으로 말이 빠르다.
3) 종교
유럽에서 이민 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종교는 사교(邪敎)라 하여 배격하였으나, 건국 후 헌법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인 만큼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으나,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유대교도도 많은데,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1998년 현재 개신교도 58%, 로마가톨릭교도 26%이며, 그밖에 모르몬교도 1%, 유대교도 1%, 기독교정교도 2%이다.
2. 역사
1) 식민지시대 이전
유럽인(人)이 이주하기 이전의 미국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피테칸트로푸스[猿人]․시난트로푸스[北京猿人]․네안데르탈[舊人]과 같은 원시적 인간이 존재하였던 흔적은 없고, 현존 인류인 인디언의 인골(人骨)과 거의 다름없는 인골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인디언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파상적(波狀的)으로 이주, 이곳의 선주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처음에 동부에서도 많이 살고 있었으나 유럽인에게 쫓겨 일부는 남부와 북부로 흩어지고, 대부분은 중서부에서 남서부에 걸쳐 정주하게 되어 지금도 그 문화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남서부 지역이 낳은 문화를 아나사지(Anasazi) 문화라고 하며 여러 시기로 나누어진다. 가장 오랜 몇 개의 시기는 ��바스켓 메이커��라고 일컫는 시기인데, 그 명칭의 유래는 이 시기에 바구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이것을 계승한 것이 푸에블로(Pueblo) 문화이다. 전자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동성의 수렵민이며 후자를 대표하는 푸에블로는 정주민이었다.
이 두 시대를 통하여 투창기(投槍器)․토기의 제작, 활의 사용, 옥수수의 재배, 초기 촌락(村落) 등이 점차로 확대되었다. 건축도 수혈식(竪穴式) 오두막에서 어도비나 돌로 만든 커다란 집으로 진화하였다. 다음 시대를 고전기(古典期)라고 하며 대략 11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커다란 암굴 밑을 이용하는 주거(住居)가 만들어졌으며, 개중에는 500개 이상의 주거가 하나의 암굴 밑에 늘어선 것도 있었고 무명천도 정교하게 짜여졌다. 이렇게 진보된 문화를 가졌던 푸에블로도 마침내 다른 유목민인 인디언(shoshoni 등)의 압박으로 차츰 퇴세를 거듭, 점거지역도 좁아져 1300년경에는 리오그란데강(江)과 리틀콜로라도강 연변에 새로운 촌락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토기가 없어지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장식된 도자기가 많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16세기에 들어서자 에스파냐인이 침입하였으나 그들은 이 지역 고유의 문화를 소멸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지금도 옛 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어 인디언의 보고(寶庫)가 되어 있다.
2) 식민지건설
에스파냐인(人)은 16세기 전반에 위의 지역만이 아니고 지금의 미국 남동부에도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탐험을 시도하였으나(이때 이미 소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데리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한편 영국은 신대륙발견(1492) 직후인 15세기 말, 동해안에 탐험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건설의 발판을 찾기 시작하여 1세기가 지난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에 본격적인 입식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후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항구적인 영국 최초의 식민지 버지니아가 건설되었다. 즉 1606년에 영국 국왕의 칙허장(勅許狀)에 의하여 건설된 런던회사(후에 버지니아회사)가 1607년에 제임스강(江) 연안에 일단(一團)의 식민자를 정착시킴으로써 이곳이 제임스타운으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어 20년에는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에 가 있던 청교도 일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州)에 상륙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1733년까지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들 식민지는 각각 그 식민의 동기(動機), 종교, 시기 등을 달리하고 있어 결코 단일체라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발전한 프랑스 식민지와 거기에 인디언까지 끼여든 3파의 항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결과 식민지 사이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3) 건국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인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었다. 독립혁명에 의하여 각지의 식민지는 주(州)가 되고 이들이 연합하여 합중국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현재 미국의 주는 한국의 시․도와 같은 행정상의 지역이 아니고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유하는 스테이트(state)이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는 모두 영국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 사상과 정치제도를 본뜨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은 여러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제(代議制)의 의회제도이다.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영국 성공회를 신봉하였으며 1619년 제임스타운에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의회를 만들어 자치(自治)를 시작하였고, 이와 동시에 미국 최초의 흑인매매도 행하여졌다. 즉 대의제 의회의 탄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와 흑인노예라는 비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가 병행하여 동시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 대의제 의회와 흑인노예 제도는 그 후에 건설된 각 식민지에서도 똑같이 채택되었으며, 식민지 거주인이 본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자치를 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국왕의 직접통치하에 있었던 에스파냐와 프랑스 등의 식민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4) 독립혁명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강(江)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희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5) 프런티어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멕시코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에는 거의 현재와 같은 대륙국가로 발전하였다. 새로 편입된 영토는 억세고 씩씩한 개척자들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프런티어란 미국 국세조사국(國勢調査局)의 정의에 따르면 1제곱 마일(약 2.6㎢)의 지역에 인구 2명 이상부터 6명까지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선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령 프런티어 사회 등으로 부를 때는 반드시 선(線)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 선에 접하는 지대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프런티어 사회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전통․혈통․가문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였으며 실력 있는 자만이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프런티어 사회는 유럽이나 동부 사회에 비하여 보다 민주적이었다.
프런티어가 언제나 서부에만 존재하였던 사실은 미국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프런티어 사회에서는 비교적 용이하게 토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자작농(自作農)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동부의 노동자도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할 때는 서부로 가서 새로운 개척을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우대를 받아 그 사회적 지위도 유럽에 비하여 월등히 높아졌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金鑛)이 발견되고 골드러시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새로운 프런티어가 동부를 향하여 이동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부로 진출하는 프런티어와 대개 로키산맥 지대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프런티어 사회도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6) 남북전쟁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식민지 건설 때부터 종교․경제를 달리하고 있었다. 북부는 그 건설 단계에서 서부유럽 및 북부유럽의 이민을 받아들여 혼합인종의 새로운 미국민족을 형성하였으나, 남부는 여전히 보수적이며 영국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있다. 식민지시대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흑인노예제도는, 미국독립혁명 때 펜실베이니아 이북의 여러 주에서는 폐지되었으나 메릴랜드 이남의 여러 주에서는 이것이 존속하였다.
특히 독립혁명 후 남부에서 면화재배가 시작되자 노예제도는 남부 경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어, 흑인노예와 백인 고용인 및 계약노동자가 증가일로에 있었다. 1808년 이후 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남부에서는 여전히 노예매매가 성행하여 북부의 인도주의자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영국 산업혁명의 완성으로 목화 수요가 급증하면서 면화는 남부에서 가장 이익이 많은 농산물이 되었고, 이에 따라 노예제도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노예제도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권한은 대통령이나 연방의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州)의 권한이었다.
북부에서는 이 이상 노예주(州)가 증가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남부에서는 새로 만들어지는 서부의 주에도 노예제도를 확장하려 하였다. 1820년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미주리주가 새로 합중국의 주가 되려고 하였을 때, 노예제도는 비로소 정치문제로 등장하였다. 결국 미주리주를 노예주로서 인정하고 가입시키는 동시에 북부에는 새로운 자유주로서 메인주의 가입을 인정함으로써 남북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이후의 주(州) 편입에 대하여는 미주리주의 남쪽 경계 북위 36°30' 이북에는 노예주의 신설을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을 미주리협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1848년 멕시코전쟁의 결과 캘리포니아․뉴멕시코 지방이 새로 합중국 영토가 되자 이 지역에 노예제를 인정할 것이냐의 여부가 문제로 되었다.
1850년 남․북은 재차 다음과 같이 타협하였다. ① 캘리포니아주를 자유주로 한다. ② 워싱턴에서는 노예매매를 금지한다. ③ 새로운 영토에 대하여는 노예제도의 존폐를 결정하지 않고 준주(准州)로 한다. ④ 도망노예법을 강화한다는 등 일련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제정되어, 미주리협정에 의하면, 자유주가 되어야 할 캔자스주가 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파기되고 말았다. 노예반대론자들은 공화당을 조직하여 남부와 대항하였다. 링컨도 공화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링컨의 입장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궁극적으로는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본질은 연방헌법을 수호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남부에서는 주(州)는 국가보다 먼저 이루어졌고 연방헌법은 주와 주 사이의 계약에 불과하므로 합중국의 어떤 주든지 불만이 있으면 합중국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링컨을 비롯한 북부의 공화당은 연방헌법은 그 전문(前文)에 ��우리들 합중국의 인민은… 이 헌법을 제정하고 확립한다��고 되어 있어 헌법은 인민상호간의 계약이므로 주가 탈퇴한다는 것은 위법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남북전쟁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원적으로는 서로 헌법상의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비롯된 싸움이었으며 이 싸움이 북부, 즉 합중국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종래 남부가 주장하여온 주권론(州權論)을 굴복시키고 헌법이 지니는 미국 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수정헌법 제13조에 의한 노예해방(1865), 제14조에 의한 시민권보장(1867), 제15조에 의한 투표권부여(1870) 등으로, 비로소 모든 흑인노예도 법적으로는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었다.
7) 재건의 좌절
남북전쟁 이후 북부 산업 부르주아지의 대변자인 공화당의 군사적 독재에 의한 정치상․사회상의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나 남부경제의 중심과제인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처리하려다가 남부의 농장주와 여기에 예속된 백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재건정책에 대한 반항은 주법(州法) 또는 지방조례로서 흑인을 사실상 차별하는가 하면 비합법적 비밀결사인 이른바 케이케이케이단(KKK) 등에 의한 흑인 살해, 협박 등 갖은 박해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북군의 남부철수와 전후하여 남부의 여러 주는 흑인의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두세(人頭稅), 교육․취직․임금 등 일상생활에서 흑인을 차별하기 위한 법의 제정이나 행정조치 등 합법적 수단은 물론, 비합법적인 차별수단을 차례로 고정화하였다. 남북전쟁 중 남부 출신 의원들이 워싱턴에서 떠났으므로 종래 남부에서 반대하던 여러 법안이 모두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중에는 산업자본주의를 조장․육성하는 국립은행법, 모릴관세법, 서부의 급속한 발전을 기대하는 자영농지법(自營農地法) 등이 있었다.
남북전쟁 후 공화당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기간에 걸쳐 장악한 일은 그후 미국사회를 공업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도시는 발달하고 교통기관도 확장되었다. 그러나 패전 후의 재건에 고심하는 남부는 여전히 농업사회로 남게 되었고 대(大)플랜테이션은 분할되었다. 해방된 흑인은 자본의 결여, 기술의 결여, 낮은 교육 수준 등으로 자립하거나 기간산업의 임금노동자가 될 수 없어 태반은 영세소작인이 되었다. 남부에 공업이 발달하여 흑인들이 공업 노동자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8) 자본주의발전
노예해방은 전쟁이 북부의 공업발전을 자극한 것과 같이 산업자본주의를 크게 발전시킨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국내자원의 개발과 교통기관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산업인 석유업․강철업을 비롯하여 다수의 거대한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독점화(獨占化)의 경향이 강하여졌다. 물론 북부 산업자본의 발전을 방조하는 공화당이 전후(戰後)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산업자본에 간섭하지 않았던 것도 산업자본이 거대해진 이유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독점에 대항하여 새로이 두 세력이 대두하였다. 하나는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의 조직이며 또 하나는 대도시에서 발달한 노동조합이었다. 1869년에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자 광부(鑛夫)나 목축업자에 이어 많은 농민이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철도는 동부의 자본으로 건설되어 그 시장을 서부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농민은 차별적인 운임 등으로 손해를 보았다.
농민 공제조합인 그레인지(Grange)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에 의하여 각 주정부에 철도운임을 규제하는 주법을 제정하게 하였고, 이것은 마침내 1887년 주간통상법(州間通商法)으로 발전하여 연방정부가 민간기업에 처음으로 통제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노동자도 미국 노동총동맹을 조직하여 숙련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도모하였다. 1891년에는 농민에 의하여 인민당(人民黨)이라는 제3당이 결성되어 이듬해부터의 선거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내걸고 세 번이나 싸웠다. 그들이 주장한 철도․전신․전화의 공영(公營), 비밀투표제의 채택, 누진소득세의 부과, 우편저금 및 소포(小包) 제도, 상원의원의 직접선거, 여성참정권 등은 20세기에 들어와 점차 실현되었다. 건국 초기에 농업이 중심이었던 미국사회는 공업의 발달과 함께 점차 변하여갔다. 그 사이에 노동력은 항상 부족하였다. 외국 이민이 갑자기 늘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부터인데, 이것은 아일랜드, 독일 등에 기근(飢饉)이 들어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이민의 태반은 주로 대서양 연안의 대도시에 정착하여 미숙련 노동자가 되었으며, 1840년대 말부터 들어온 많은 독일이민은 중서부로 들어가 농민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혁명에 패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자 그때까지의 서․북유럽으로부터의 이민보다도 남․동유럽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민과는 달리 주로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민으로,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국에서 왔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 더구나 종교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므로 종래의 이민에 비하여 동화력(同化力)이 없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때문에 1920년대에는 할당이민법(割當移民法)의 재정을 보게 되었다. 테오도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부터 대통령 윌슨의 제1기말, 즉 1919년까지의 시기는 독점 반대의 사회개혁이 행하여진 시기였으며, 이것을 혁신주의시대라고 한다. 공공의 복지를 해롭게 하는 독점은 정부에 의하여 고발되고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해산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지주회사(持株會社)를 금지하는 반(反)트러스트법이 제정되었다. 루스벨트는 노동쟁의도 정부가 직접 조정한다는 선례를 만들었으며, 또 상무부(商務部) 노동성이 신설되었다. 또한 철도의 통제에 대하여도 주간통상법을 강화하는 여러 법률이 제정되어 국토자원의 보존이 행하여졌다. 태프트 시대에는 우편저금 및 소포제도가 만들어지고, 또 누진적 소득세를 규정하는 수정헌법 제16조 및 상원의원의 직접선거를 정한 제17조가 1913년에 제정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관세인하와 은행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9) 참전과 뉴딜정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에는 결국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독일의 잠수함전에 반대하는 국내 여론과 중립기간 중에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된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에는 대통령인 윌슨 자신이 출석하여 11개 조항의 원칙을 실현하게 하려 하였으나 결국 국제연맹안(案)을 평화조약안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다. 더구나 국제연맹안은 국내의 반대가 강력하여 끝내 상원의 비준을 얻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대의 미국은 공화당의 시대로 바뀌어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 국내적으로는 또다시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1920년대에 라디오, 자동차, 영화, 인견공업(人絹工業) 등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여 미국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 반면, 농업․석탄․면공업(綿工業)은 쇠퇴하였다. 공화당은 또다시 고관세(高關稅) 보호정책을 취하였으므로 국제무역은 침체되고 기업활동과 독점은 더욱 촉진되었다. 호경기는 1925년에 그 절정을 맞이하여 주식투자가 성행하고 과대투기가 유행하였다. 이것은 번영이라 하지만 균형 있는 것이 되지 못하였다. 1929년 10월 뉴욕주식시장의 주가폭락을 계기로 대공황(大恐慌)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즉시 유럽에 파급되어 세계공황으로 번졌다.
국민의 구매력은 떨어지고, 예금은 고갈되고, 국민총생산은 3/4으로 떨어지고, 노동자의 1/3은 실직상태에 빠졌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뉴딜정책을 시행하였다. 뉴딜은 1단계로 대공황에 대한 대응책이었으나 더 나아가서는 재차 이러한 대공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것이었다. 독점기업은 정부 권력이 개입, 동종(同種) 산업 간에 규약을 만들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통제되었고 농산물 과잉상태는 정부의 통제에 의한 경작 면적의 삭감으로 개선되었다. 전력(電力)과 같은 공공사업에 대하여는 TVA(테네시계곡 개발공사) 같은 공공 법인체를 만들어 민간기업과 경쟁하는 일도 인정하였다.
1935년에 제정된 바그너법에 의하여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계약권이 인정된 결과 조직노동자의 수는 대폭으로 증가하여, 숙련공 중심으로 직능별 조합주의인 미국노동총동맹(AFL)에 대하여, 산업별 조합주의인 미국산업별조직회의(CIO)도 새로 결성되었다(1955년에는 양자가 합병하여 AFL-CIO가 되었다). 사회보장도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처음으로 연방정부에 의하여 행하여지게 되었고, 1938년의 공정노동기준법에 의하여 최저임금 및 최고노동시간제가 정해졌다. 이들 새로운 정책을 통하여 연방정부의 권한은 대폭적으로 확대되고 종래의 자본주의의 폐단은 크게 시정되어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사회복지적인 여러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 경향은 그 후에도 변하지 않아 정권이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상관 없이 확고한 항구적 제도가 되었다. 트루먼이 내건 페어딜도, 아이젠하워의 뉴리퍼블리커니즘도, 존슨의 ��위대한 사회��도 모두 원칙적으로는 뉴딜의 선을 더욱 확대시키려는 데 불과하다.
3. 정치
1) 외교
미국 독립 당시의 유럽은 프랑스혁명 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중립주의를 취하고 오로지 국력의 충실을 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먼로주의라고 하는 비개입 고립주의(非介入孤立主義)로 미국 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국내의 자본주의 체제가 정돈되고 국내 프런티어가 메꾸어지자 태평양을 향하여 적극적인 진출정책을 취하였으며,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결과 하와이, 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등을 병합하고 이어서 1921년에는 중국시장의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워싱턴조약을 체결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에는 먼로주의를 관철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말려들었으나, 개입의 배경에는 유럽에서 초대국(超大國)으로 성장한 독일의 세력이 미국의 번영을 크게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 당시 그 역할이 지대하였던 미국은 유럽의 피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대두 등 국제정세에 비추어 외교정책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의 참가,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 원조, 중국의 공산화, 더욱이 소련과의 냉전 격화 등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에서 ��반격정책��을 목표로 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적극적인 체결 및 신흥 제국에 대한 원조로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한 미․소 간의 해빙(解氷)은 1962년의 쿠바미사일위기를 거쳐 1963년의 부분적 핵실험 정지조약의 체결을 성립하게 하였고 1970년부터 시작된 SALT(전략무기감축협정)에서는 우발 핵전쟁 방지협정이 1971년 9월에 체결되었다. 5월에는 대통령 닉슨이 소련을 방문함으로써 ABM망(網)의 제한 등 일련의 성과가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통령 레이건 때 다소 경화되었던 미․소 관계는 대통령 부시가 1989년 12월 몰타에서 소련 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적대관계에서 동반관계로 변화하였다. 양 거두는 베를린 장벽 개방과 동유럽의 혁명적 개혁을 지지하면서 비개입을 다짐, 냉전시대의 종식과 신(新)데탕트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와 새로운 협력관계를 추진해온 미국은 1993년 2단계 전략무기 감축 협정 합의, 대 러시아 경제지원 등으로 옐친정부의 민주화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의 종결 후 대 중국관계의 개선에 노력하던 중 1979년 1월부터 정상화되었던 미․중 관계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크게 진전되어 왔으나, 중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1989년의 톈안먼[天安門] 사건으로 급격히 냉각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평화와 동북아 지역 안정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고려하여 미국은 대 중국 최혜국 대우를 연장하였으며, 1993년 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경제지도자 회의에서 양국 관계 강화와 경제협력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대 중남미정책으로는 1989년 12월의 미군 파나마 침공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으며,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있다.
1979년에 조인된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조약, 1980년대의 이라크․이란 전쟁과 호메이니 사망 후의 대 중동 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나 1990년 이라크군의 전격적인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다국적군의 반격으로 시작된 걸프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국제적인 지위는 한층 견고해졌다. 그후 이라크, 리비아 등에 대한 강경한 외교노선을 펴는 한편 이스라엘과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의 화해를 주도함으로써 중동평화협상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으로 5,0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고, 미국은 그 주범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중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Usama Bin Laden)을 지목하고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하메드 오마르(Mohammed Omar)가 이끄는 탈레반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우방인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미국의 침공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는 이슬람문화권과 미국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2) 군사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평시에는 대규모의 상비군을 두지 않고 필요에 따라 모병하는 제도를 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적으로 중요해지고 또한 대규모화되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대통령의 통할하에만 두었던 군사기구를 대폭적으로 개편하여 1947년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하고 육․해․공 3군(三軍)장관 위에 국방장관을 두어 1949년 국방부(國防部)를 신설하였다. 동시에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설치되어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정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한국, 베트남, 중동 등 국지적으로 분쟁이 계속되었으나, 세계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국가들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共産圈) 사이에는 핵무기 보유상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힘에 의한 평화��가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989년 12월 몰타에서 열린 미국 대통령 부시와 소련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 간의 정상회담 이후 냉전시대의 종식과 신데탕트 시대가 열림으로써 크게 변화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미․소간 군축회담도 활발히 진행되어 START(장거리전략무기 감축회담),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간의 유럽배치 재래식 전력(CFE) 감축회담, 그리고 ��화학무기금지조약��이 1993년 1월에 조인되었다.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은 전통적인 군사력보다는 첨단 과학기술에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점점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주요 테러리스트 국가들의 위협에 대비해 추진중인 미사일방어(MD)계획과 함께, 군사력의 현대화 계획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병역은 지원제로서, 1992년 당시 총병력이 181만 명에 이르고 공격용과 방어용 외 전략핵을 비롯한 국방비를 위하여 매년 국가예산의 약 30%가 지출되자 대대적인 국방력감축계획을 추진하였다. 2000년 현재 총병력은 138만 4000명이고 2001년도 국방비는 3099억 달러이다.
4. 경제
1) 농림수산업
미국은 광대한 국토의 대부분이 온대기후에 속하는데다가 평지도 넓어 자연조건의 혜택을 받은 세계적인 농업지대를 이룬다. 그리고 남북전쟁 후의 공업화와 노동력 부족은 일찍부터 기계화농업을 발달시켰으며, 대규모의 합리적인 기업적 농업이 주가 되었다. 미국 경제 전체로 보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림․수산업의 비율은 불과 3%이며, 취업인구 비율에서도 4.3%에 불과하나, 그 생산규모는 세계 유수의 농업국임을 입증한다.
경지(耕地)․수원지(樹園地)의 면적은 약 2억ha로 세계 제1위, 목초지는 2.4억ha로 오스트레일리아․러시아연방에 이어 세계 제3위이다. 농산물 중 밀은 세계의 12.6%로 세계 제2위이고, 옥수수 46%(1위), 콩 66%(1위), 귀리 20%(2위), 담배 17%(2위), 목화 23%(1위), 포도 67%(1위), 귤 19%(1위), 파인애플 19%(1위), 사과 14%(1위) 등 세계 제1~2위를 다투는 생산량을 올리고 있다.
축산에서도 우유․버터․육류․치즈․달걀의 생산량이 세계 1~2위를 다툰다. 임업은 태평양 연안 북부의 워싱턴주․오리건주 및 로키산맥 지역이 성하며, 용재(用材) 생산량은 세계 25%, 펄프 생산은 세계 37%를 차지하여 모두 세계 제1위이다. 조림사업에 의한 2차림(二次林)은 극히 적고, 원생림(原生林)의 벌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삼림의 보호관리에 노력하고 있다. 수산업은 북태평양․북대서양의 세계 4대 어장 중에서 2개의 연안어장을 가지고 있으나, 어획량은 270만t으로 세계의 4%(6위)에 그쳐 세계 최대의 수산물(가공품을 포함) 수입국이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식량의 완전자급이 가능한 몇 나라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수출능력도 높고 대형 농업기계나 비행기까지 사용하는 고도의 기술로 생산성도 높다. 또한, 밀이나 쌀은 가격안정 등 원활한 수급을 위해 경작제한 등 미국 정부는 생산 억제정책까지도 취하고 있다. 미국 농림업의 지역분포는 기업적 경영과 적지적작(適地適作)업이 특징이다. 중서부의 옥수수지대, 남부의 목화지대, 프레리의 밀지대, 그레이트플레인스의 기업적 방목과 건조․관개 농업, 캘리포니아의 과수농업, 로키산맥과 태평양 연안의 해안산맥 지대의 침엽수림, 멕시코만안의 원교농업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2) 공업
영․미전쟁(1812~1814)으로, 영국으로부터의 공업제품 수입이 단절된 것을 계기로 국내 공업이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북부의 산업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은 그후 공업 입국(立國)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거기에 풍부한 지하자원과 제1,2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국제적 우위성을 배경으로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공업생산량은 일본․독일․프랑스의 합계에 필적할 뿐만 아니라, 항공기․전자계산기․우주산업 등 기술적인 면에서도 최첨단을 걷고 있다. 공업은 국민총생산의 26%, 취업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이 나라 최대의 산업으로 세계에서 그 생산성이 가장 높다.
중화학비율은 51%로서 독일․영국보다 낮으나 일본보다 높다. 미국 공업 최대의 특징은 거대한 독점자본에 의한 과점(寡占)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업관계 기업의 매출액에 의한 세계적 랭킹 상위에 드는 기업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동차업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제너럴모터스․포드․크라이슬러, 전기업계의 상위를 차지하는 제너럴일렉트릭․IBM․웨스턴일렉트릭, 석유업계 1위인 엑슨, 철강업계 1위인 US스틸, 화학업계 1위인 뒤퐁, 항공여객기 업계 1위인 보잉사(社)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상위권 50사(社)가 전국 생산량의 65%, 취업자의 75%를 독점하고 있다. 철강 부문에서는 일본이, 자동차와 가정용 전기제품 부문에서는 일본․독일 등이 눈부신 진출을 보여 미국의 국제적 독점의 비중이 낮아지고는 있으나, 이들 제품 대신 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항공기․우주산업․컴퓨터 등을 대표적인 공업제품으로 생산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컴퓨터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들 공업은 정부의 국방지출에 의하여 지탱되는 군수산업이기도 하여, 이 산군복합체(産軍複合體)가 새로운 기술개발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 미국 공업은
원래 자원입지형(資源立地型)으로 북동부에서 오대호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석탄과 철광자원에 의존한 공업지대를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지식․기술집약형 공업이 주류를 이루면서 텍사스주나, 애리조나주 등의 남서부, 또는 캘리포니아주나 워싱턴주와 같이 태평양 연안의 쾌적한 지역에 공업이 분산입지하여 새로운 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3) 지하자원과 에너지자원
미국은 국토가 넓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광산자원이 풍부하여, 니켈 등 극히 한정된 일부의 비철금속을 수입하는 이외에는 자급률이 높은 광업국이다. 석탄은 확인 매장량이 세계의 17%로 러시아연방에 버금가며 생산량도 러시아연방과 수위를 다투고 있다. 애팔래치아산맥 중의 펜실베이니아 탄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역청탄은 미국의 철강업, 나아가서는 공업번영의 조건이 되었다. 석유는 구미제국 중에서 최초의 산유국으로 그 매장량은 세계의 6%에 지나지 않지만 산유량은 19%로 세계 제1위이며, 천연가스도 1위이다. 그러나 석유의 소비량도 많아 세계 석유소비의 30%를 차지하는 수입국이기도 하다.
석유자원의 고갈을 예견하여 근년에는 국내 산유량을 억제하고 수입을 확대하는 한편,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 서부에 널리 매장되어 있는 오일셰일(oil shale:油母頁岩)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기술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철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사비 광산이 있으며, 오대호를 천연의 운하로 삼아 애팔래치아 산맥의 석탄을 이용, 세계 제1의 철강업을 육성하였다. 비철금속(非鐵金屬)으로는 구리가 세계 생산량의 22%를 차지하는 것을 비롯하여 납 15%(1위), 바나듐 42%(1위), 몰리브덴 64%(1위), 아연 8%(3위) 등을 생산하며, 경금속 마그네슘도 47%로 1위이다.
에너지 소비량은 그 나라의 경제나 물질문명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指標)라고 하는데 미국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세계 제1위이다. 1998년 현재 전국 전력 생산의 68.24%가 풍부한 석탄자원에 기초한 화력발전으로 이루어지며, 수력(1.49%)과 원자력(28.48%)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특히 TVA를 비롯한 컬럼비아강, 콜로라도강 등의 전력․관개․용수․홍수 조절․관광을 포함한 하천 종합개발은 세계에서도 선구적인 업적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컬럼비아강의 그랜드 쿨리댐(최대출력 201만kW:1942년 완공), 콜로라도강의 후버댐(135만kW:1936년 완공) 등은 규모가 크기로 알려져 있다. 그레이트플레인스의 관개농업, 캘리포니아 분지에서의 대규모 관개에 의한 과수와 벼농사도 수자원 개발의 성과이며, 시카고를 물리치고 미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한 로스앤젤레스의 발전은 콜로라도강의 종합개발에 의하여 상수(上水)가 공급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산업으로 알려져 있는 알루미늄공업에서도 미국이 세계의 33%(1위)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TVA계획 이후의 일이다. 1992년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는 109기(基)로 1억 455만kW이며, 계획 또는 건설 중인 것이 8기나 되어, 모두 완성되면 117기로 1억 1456만kW의 전력을 공급할 예정이며, 원자력 발전의 연료가 되는 우라늄석도 세계의 53%를 산출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전체 전력 생산량은 3430억 9900만kWh이고 총소비량은 314억 8200만kWh이며 2억kWh는 수출한다. 전력 생산 비율은 화력발전 68.24%, 수력발전 1.49%, 원자력발전 28.48%, 기타 1.79%이다.
4) 무역
세계 제1의 물적(物的) 생산력을 가진 미국은 세계 무역시장에서도 제1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상대적 지배력은 독일․일본․이탈리아 등의 대두로 점차 저하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1947년에 33%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으나 1955년에는 17%로 거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수준으로 저하되고, 최근에는 12%로 떨어져 급속한 신장세를 보인 독일의 11.3%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미국이 유럽에서의 절대적 지배력을 독일에 물려주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그 지위를 잠식당하고 있다.
또한 국제수지면에서도 미국은 원래 무역수지의 흑자로서 자본유출(대외투자․경제원조 등)의 적자를 메워 국제수지의 균형을 유지하여 왔으나 자본수지 적자의 확대와 함께 1960년대 중반부터 무역수지도 약화되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1888년 이래 최초의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는 산업경쟁력의 약화와 달러화의 과대평가 및 생산능력을 넘어선 지나친 소비경향에 의한 것이다.
2000년의 수출은 전년보다 12.3% 증가한 7817억 달러, 수입은 전년보다 18.7% 증가한 1조 2164억 달러로 무역적자는 4347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캐나다, 멕시코, 일본, 영국, 독일, 한국, 네덜란드, 타이완, 프랑스 등이고, 수입 상대국은 캐나다, 일본, 멕시코, 중국, 독일, 영국, 타이완,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다. 수입품은 자동차, 기계류, 사무용기기(컴퓨터 포함), 섬유, 텔레비전․VTR, 원유 등이고, 수출품은 기계류, 자동차, 사무용기기(컴퓨터 포함), 비행기 등이다.
5) 교통통신
미국은 광대한 국토에 대하여 철도․수운․자동차․항공기 등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국토의 고도이용을 능동적으로 추진해 온 나라이다. 개척시대, 광활한 지역에 걸쳐 대규모 개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철도이며, 독립 후에는 영국․멕시코와 싸우면서도 볼티모어․오하이오철도(1830)를 개통시켰고, 남북전쟁 4년 후에는 최초의 대륙횡단철도(1869)가 개통되었다. 철도가 19세기를 통하여 미국의 산업자본 형성에 미친 영향은 컸으며, 세계 제1의 철도왕국을 이룩하였다. 1970년대 미국은 철도여객업무를 전담할 미국철도여객공사(AMTRAK)를 창설하여 전국 500여 개 정거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업철도 연장 33만 8000km는 세계 제1위이며, 현재 철도의 기능은 여객수송보다 화물수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연간 1조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고 있다.
화물수송에서는 내륙수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은 천혜(天惠)의 수로로서 미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오대호와 허드슨강을 연결하여 뉴욕의 발전을 촉진한 이리운하(運河)와 대서양 항로의 외항선박이 직접 오대호에 드나들 수 있게 한 세인트로렌스수로(水路) 등은 많은 내륙운하 중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4만 1009km에서 항행이 가능하다.
자동차가 출현하자 정부는 자동차 산업의 육성을 적극적으로 꾀하는 한편, 교통정책을 철도에서 도로로 전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간선국도(幹線國道)였던 US 하이웨이는 40만km의 포장도로이다. 전후에는 증가하는 교통량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주 새롭고 완전한 중앙분리대를 형성하여 평면교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편도(片道)가 최소 2차선인 도로 6만 8000km의 주계간 고속도로(州界間高速道路:Interstate Highway)를 1956년에 착공하여 1975년 완공하였다. 이들 도로와 대형화된 고성능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도시가 교외로 확산되어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미국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인구 1.7인에 1대라는 세계 제1의 자동차 보급률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97년 현재 도로 총연장은 634만 8227km이다.
그러나 최근 도시의 교통체증과 지나치게 자동차에 의존하는 생활, 그리고 자원낭비 등에 대한 반성이 싹트기 시작하여 도시의 대중 교통기관의 필요론(必要論)이 대두되어 새로운 교통기관의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지상 교통의 발달뿐만 아니라 높은 국민소득에 의하여 항공교통도 전후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대도시는 서로 다투어 거대한 비행장을 건설하였으며, 지방의 소도시까지 항공로로 연결되어 있을 정도이다. 1960~1970년 동안에 플로리다, 텍사스, 애리조나주(州) 등이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메갈로폴리스의 인구증가의 둔화가 눈에 띄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인구분산을 촉진한 원인의 하나로 항공교통의 보급을 들 수 있다. 미국의 민간항공은 1999년 현재 1만 4572개가 넘는 공항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어서 많은 승객과 화물을 운반하고 있다. 미국의 여객수는 전 유럽의 항공여객 총계의 3배 이상이나 된다. 헬리콥터 공항은 118개가 있다(1999).
미국의 통신제도 중 우편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것은 민영화되어 있다. 1876년 A.G.벨에 의해서 전화가 발명되고 1878년에 벨전화회사가 설립되었고 1885년에 미국 전화전신회사(ATT)가 되었으며, 그후 벨 시스템은 전국 전화대수의 80%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웨스턴일렉트릭을 비롯한 많은 기업을 산하에 두고 있다. 전신사업은 1851년에 설립된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에 의하여 거의 독점되고 있다.
미국은 전화 1억 7800만 회선(1999)과 이동전화 가입자 5531만 2000명(1997)을 보유하고 있다. 인터넷 제공 사업자는 7,600개가 있다(1999).
5. 사회
1) 특색
미국은 외국으로부터 계속되는 이주자와 그 2세․3세가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민족국가이다. 그 동안 남북전쟁과 세계대전, 그리고 2001년 9월 11일의 항공기테러사건 등 몇 번의 위기도 있었으나 인종과 민족의 배경을 넘어서, 미국 국민으로서의 국가의식을 점차 강화해왔다. 성조기(星條旗)는 그 상징이다. ��개방적이고 명랑하며 활기에 찬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도 피부색을 넘어서 미국적인 사회와 문화 위에 정착한 국민적인 공통성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시민생활은 1인당 국내총생산 3만 4063달러(1999)로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수준을 과시한다. 또, 국민의 77%가 도시에 살고 있으며, 도시 중에서도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에 63%의 인구가 집중하여 세계에서도 가장 도시화가 진전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대도시 교외의 주택지에서 넓은 잔디밭에 산뜻한 집을 짓고 살며, 주말과 휴가 때에는 야외의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생활상(生活像)이 시민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도심지에는 초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고 그곳으로부터 사방으로 뻗은 정비된 고속도로, 그 연변에 펼쳐져 있는 나무가 우거진 주택지의 풍경은 현대 미국의 전형적인 경관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풍요한 사회상의 이면에는 다인종․다민족의 혼합에서 생기는 심한 인종차별과 독점자본주의사회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인 빈부계층 간의 대립이 늘 미국 국내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인종문제는 2000년 현재 전인구의 12.2%를 차지하는 흑인, 4.5%를 차지하는 인디언과 아시아인종에 대한 차별이 주요 이슈이며, 그밖에 히스패닉계와 유대인 등이 있다.
특히 흑인으로 대표되는 흑색이나 황색의 외견적 차이는 결코 백인과의 융화를 허용할 수 없다는 숙명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 숙명적 차별감과 아울러 남부의 농업지대에서 일자리를 잃은 흑인들은 교육수준이 낮고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의 여러 도시에 유입(流入)해도 일자리가 없어 하층사회에 침전하여 그곳에 슬럼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빈민굴에서는 자녀들도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고, 성장한 후에도 취업의 기회마저 얻을 수 없다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헌법에 밝히고 있는 미국이지만 앵글로색슨의 우월성은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으며, 흑인과 황색 인종에 대한 백인의 차별의식도 강하다.
흑인들은 자연히 이에 반발하게 되며, 미국사회 속에 지금 하나의 반독립적(半獨立的)인 흑인사회가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다.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일어난 로스앤젤레스폭동도 흑백문제가 그 배경이었다. 빈곤 문제는 흑인 사회뿐 아니라, 빈곤백인(貧困白人)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민들 사이에서도 심각하다. 대도시의 슬럼은 빈곤에 기인한 도시 범죄(강도․절도․폭행․마약․매춘)의 온상이 되어 범죄 발생률도 해마다 증가하는 경향이다. 인플레이션의 진행과 미국경제의 사양화(斜陽化)에 따른 실업률의 상승이 한층 더 이에 박차를 가하여, 미국의 대도시 뒷골목에서는 일몰 후에는 물론 낮에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정도이다.
전(前) 뉴욕 시장(市長) 존 린지는 자신의 저서 《병든 도시》 중에서 ��시내 모든 지역을 온종일 감시하려면 매년 250억 달러(시 총예산의 4배)는 필요하다��고 한탄하였다. 도시의 생활환경이 악화됨에 따라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 도시를 버리고 교외로 이주하는 경향이 심해져, 도시의 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실정이다. 공채상환이 어렵게 되자 파산을 선언한 곳도 발생하였다. 월남전의 개입과 패배, 세계경제에서 지배력의 약화, 워터게이트 사건, 대폭발테러사건 등 어두운 면이 계속되었으나, 새로운 미국 건설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2) 교육
미국의 교육제도는 주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의 주에서 6세에서 16세까지 12년제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6~8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4년으로 나누어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17, 18세까지 학교에 다닌다. 고등학교 과정에는 대학진학 준비과정․상업과정․교직과정․일반교양과정의 4개 과정이 있다. 대학은 4년제와 2년제의 초급대학이 있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종합대학으로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스탠퍼드․캘리포니아대학교가 있고, 공학계로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성인교육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사회인의 지적 향상, 직업재훈련, 이민의 미국화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의 각종 학교수는 11만여 개이며, 총학생수는 약 60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 대학의 하기강좌, TV강좌, 통신교육․야간대학 등이 많이 있다. 중등교육기관의 취학률이 19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대폭 증가하였고 베이비붐으로 인하여 1970년대에는 절정을 이루었다.
1971년에서 84년까지 전체 초․중등교육기관의 취학률은 취학 아동이 감소하여 낮아졌다가 1985년부터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높아졌다. 공립 유치원의 등록 인원이 1988년 2850만 명에서 1998년 335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초․중등교육기관의 재학인원은 1998년 1330만 명에 달하였다. 1997년 현재 45만 8000명의 외국학생들이 유학하고 있고, 그중 57%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출신이다.
3) 사상
미국 역사 초기에 종교상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초기이민자들은 강한 극기심과 목적의식(말하자면 그것이 식민지 획득의 야망일지라도), 또는 스스로의 노력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자손들에게 전하려는 자세로 목적 달성을 위해 인디언의 대량학살과 노예의 사용을 거침없이 해냈다. 또 때로는 인디언으로부터 의식주에 대한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즉, 이민은 극도로 실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힘찬 에너지로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등을 비롯한 많은 전쟁을 거쳐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믿는 자유, 즉 미국적인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를 구가(謳歌)하고, 그것을 국내외에 펼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미국의 사상과 생활은 이 저류(底流)를 기반으로 늘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철학은 처음 반(反)가톨릭의 엄격한 퓨리터니즘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나 R.W.에머슨에 의해서 대표되는 초월주의(超越主義)가 대두하였다. 개인은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개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산업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반대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산업혁명을 촉진한 남북전쟁 후 초월주의는 자연 소멸되었다. 이에 대신하여 세력을 얻은 사상은 W.제임스 등에 의해서 제창된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진리는 그 실제적 효용, 특히 인간의 행동에 끼친 영향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이 사고방식은 근대과학, 특히 심리학의 대두와 연결되며 현재에는 사회과학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심리학적 경향의 원천이 되었다. J.듀이는 실용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사상은 환경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며 인간의 경험이나 진보에 도움이 되는 것일수록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도구주의(道具主義;인스트루멘털리즘)를 제창하였고 그후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였으나 오늘날 미국 기계문명의 밑바탕에는 지금까지 실용주의가 엄존하고 있다.
6. 문화
1) 예술스포츠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옛 세계��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풍부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미국의 대중음악과 영화는 세계 각국의 문화에 빠르게 흡수, 발전되었다. 한편 20세기 후반 경제적인 여유와 여가시간 및 여가활동에 대한 수요증가는 미국사회에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위락산업을 발달시켰다. 스포츠의 특색은 순수한 기업으로서 이루어지는 프로 스포츠, 학교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적인 의의를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 그리고 개인적인 오락으로 행해지는 레크리에이션 스포츠의 유기적인 융합이라 하겠다.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행사로는 프로야구의 월드시리즈, 프로미식축구의 슈퍼볼, 프로농구의 플레이오프전, 프로아이스하키의 스탠리컵 등이 있다.
2) 매스커뮤니케이션
미국의 신문 보급률은 세계 제1이며 정치․사회․교육면에서 큰 구실을 하고 있다. 국토가 넓고 지방자치가 확립되어 있는 데다가 각 도시마다 사정이 다르며 주민들은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므로 도시단위로 발달하였다. 대부분 지방지로 각주(各州)마다 일간지․일요지를 따로 내고 있다. 또 대다수의 신문사는 전국․해외 뉴스를 AP․UPI 양 통신사로부터 받고 있다.
2000년 3월 현재 미국 최대 일간지는 《USA투데이》이며, 100만 부 이상의 일간지는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이며, 그밖의 주요일간지는 《워싱턴포스트》, 《시카고트리뷴》 등이 있다. 시사주간지는 《타임》, 《뉴스위크》,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 등이다. 잡지는 발행부수 최고 2000만(《TV가이드》)에서 100만까지의 월간․격월간․주간이 52개지(誌)인데, 그중 200만 이상인 것이 23개지이고, 대부분이 가족중심․취미․오락을 취급한 가정물이다.
전국의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은 거의가 NBC, CBS, ABC 및 라디오만의 공동기관인 MBS의 계열하에 있고 전술한 3개사(社)는 위성 중계방송에 적극적이며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국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유선방송인 CNN은 24시간 뉴스방송을 한다. 1997년 현재 라디오 방송국은 AM 4,987개, FM 4,932개가 있다. 대부분의 TV방송국이 미국의 4대 네트워크인 NBC, CBS, ABC, MBS와 제휴하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퍼진 TV는 1998년 현재 1,572개의 공중파 방송국과 1만 845개의 케이블TV방송국이 있다. 1995년 현재 25만 부 이상 발행하는 일간지 수는 41개이고, 10만~25만 부수의 발행 일간지수는 68개이다.
7. 과학기술
미국의 국적을 가진 학자가 자연과학계통의 노벨상을 거의 해마다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기초적인 과학연구, 특히 원자력, 우주관계 등의 기술개발 부문에서 미국은 세계의 첨단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설비의 완비, 풍부한 연구비는 물론, 기초연구의 세분화에 따른 전체의 뚜렷한 진보, 외국학자의 영입 등에 의한 발전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러시아연방과의 미사일․인공위성 등의 경쟁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바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에 직접․간접으로 쓸모 있는 연구계획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각 기관으로부터 풍부한 자금이 지원되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다. 원래 미국은 과학기술면에서도 유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고전(古典)에 편중하는 유럽 각 대학에서는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고(思考)가 최고이며, 노동은 최저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노동의 신성��을 부르짖고 통나무의 오두막에서도 대통령을 배출하는 신대륙에서는 타당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노동이 성공에의 지름길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광대한 황야를 개척하려면 여러 가지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도구․기계․기술로 각종 수공업이 비롯되었으나 유럽의 모든 기술이 조국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미국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기술혁신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대륙에서는 기술혁신이 정체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촉진되고 있었다. 미국은 개인의 창의력과 능률을 존중하고 사기업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H.포드(자동차), T.에디슨(전력), A.G.벨(전신전화), E.H.게리 및 J.P.모건(제철) 등은 합리적인 기업운영으로 이름나 있으며, 이들은 미국 기간산업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최근의 과학기술은 항공기․인공위성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서로의 경계선이 희박해져서 양자를 포함하는 ��거대한 과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연구원을 조직화하고 정부의 거대한 장기적 재정투자를 필요로 한다. 이 면에서도 미국은 당분간 세계의 무대에서 독주할 것이다.
9. 대한관계
1) 조선시대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34년(순조 34) 아시아지역에 파견되었던 미국의 로버츠 특사가 ��조선과도 교역할 가능성이 있다��고 귀국보고를 하면서부터이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1845년(헌종 11) Z.프래트 의원이 ��조선에 대한 통상사절파견안��을 제기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후 몇 차례의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은 후 한․미 양국이 공적으로 접촉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신미양요(辛未洋擾)��라는 불행한 사건이다. 1874년(고종 11) 대원군이 실각되고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자, 1880년 미국은 일본을 중재국으로 하여 슈펠트 제독(提督)이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이 ��중재외교��도 조선측의 거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어온 양국의 수교문제가 난항을 거듭할 무렵, 일본에 주재하던 청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의 외교진로에 관해 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 입수되어 이것이 어전회의에 상정된 뒤부터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양국관계가 호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정부는 종전까지 영국이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해적국가이거나 오랑캐 나라로 생각하였던 미국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1882년(고종 19) 전문(全文) 14관(款)으로 이루어진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3년 5월에는 초대 미국전권공사 H.푸드가 입국해서 비준서(批准書)를 교환하였고, 조선정부에서도 같은 해 6월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관 홍영식(洪英植) 등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후 조선정부의 외교노선이 연미정책(聯美政策)으로 기울어져, 한반도에서 청국․일본․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는 데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의 고립외교정책(비간섭정책) 때문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한국의 정책에 간섭하지 말라��고 미국공사에게 훈령을 보낼 정도였다. 또한 미국은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결과로 차지하게 된 필리핀을 중시하여 1905년에는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과 일본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회담을 열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의 우월권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비밀협약이 성립됨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일본의 한국강점을 방관한 미국은 1905년 11월 한․일 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이듬해 3월 다른 외국공관보다 앞서 공관을 철수시킴으로써, 그때까지 23년에 걸쳐 맺어졌던 양국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 사이 양국의 경제교류도 미미하여 1895년의 경우 한국의 총수입액 416만 달러 중 대미수입은 약 7만 달러로 전체수입액의 1.7%에 불과하였고, 같은 해 미국의 총수출액 9억 2,100만 달러 중 대한수출은 총액의 0.013%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에서 취득한 경제적 이권을 보면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뒤에 일본에 양도), 운산금광(雲山金鑛) 채굴권, 서울 수도시설권 등을 획득하였고,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전기를 공급하고 전차를 들여왔으며, 영국과 합작으로 인천에 연초공장을 세운 정도였다. 189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입국한 미국인은 47명으로 집계되어 청국인(1,236명), 일본인(871명), 러시아인(56명)에 이어 4위를 기록하였다. 한국인은 1903년부터 미국에의 노동이민이 시작되어 1905년까지 약 7,000명이 하와이에 이민하여 이후 미국 각지에서 집단을 이루면서 살게 되었다. 민간인으로서 제일 먼저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이,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때 저격당하여 생명이 위태로웠던 민영익(閔泳翊:초대 미국전권대신)을 치료하여준 일은 한․미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그 동안 기피하여온 서교도(西敎徒)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파견한 선교사는 왕실에서 특별히 후원하였다.
따라서 1885년 이후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이 선교의 부대사업으로 시작한 교육․의료․학술 부문의 모든 시설은 한국이 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들에 의해 전래된 개신교(改新敎)는 이보다 1세기 앞서 전래된 카톨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교(傳敎)되었다. 이때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는 1886년 이후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경신학교․숭실학당(崇實學堂:평양)․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연희전문 등으로, 이들은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사립학교로서 한국 근대교육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1886년에 설립된 관립 육영공원(育英公院)도 미국에서 초빙된 H.B.헐버트 등 3명의 교사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으며, 여기서는 영어로 강의하고 교과서도 영어로 되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1911년 추방당할 때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선교․육영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입국 직후부터 의료활동을 편 알렌은 1885년 고종에게 건의하여 서의식(西醫式) 왕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 병원은 후에 선교단에 인계되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였고, 여의사 스크랜턴, 하워드, 매길 등은 종로와 정동(貞洞)에 부인병원을 설립하여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소개하였다. 이들의 의료활동에 따라 한국의 의료제도도 종래의 한의학 중심에서 부분적이나마 서양의학으로 변혁되어 1894년에는 내부(內部:내무부)에 서양의학을 위한 위생국이 설치되어 전염병 예방, 세균검사 등 근대적 위생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밖에 전기․전차․축음기․활동사진 등 한국인을 놀라게 한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를 처음으로 한국에 들여온 것도 미국인이었다.
1884년 유길준(兪吉濬)이 첫 미국 유학생이 된 이래, 미국은 한국의 면학도에게 유학의 메카가 되어왔고, 많은 유학생들은 선각자로서 조국광복과 조국의 근대화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말기에 정치․경제면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였으나, 문화면에서는 근대문화 도입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2) 한국의 독립과 미국
1919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기초조건으로 발표한 14개조 중의 ��민족자결�� 조항은 우리 국민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믿게 하였고, 이것은 3․1운동이라는 민족항쟁을 폭발시킨 정신적 거점이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을 규탄하였고, 미국 의회에서도 같은 해 6월 30일 한국문제가 제기되어 3년간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에 관한 여러 보고서․성명 등이 의회의 속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10월에는 상원에서 "미국의회 상원은 한국민이 원하는 정부수립을 위한 큰 뜻에 동감을 표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12월에는 1905년의 주한미국공사관 철수와 미국이 한․일 합방조약을 정당화한 과오 등 "미국 외교사상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데 대해 반성할 기회를 가지자"는 제안이 의회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공식태도는 오히려 냉담하여 재미교포나 임시정부요인 등 애국지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이에 반하여 미국의 신문․잡지 등은 일본의 야만행동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 1919년 3월부터 1920년 9월 초까지 한국에 동정적인 기사가 약 9,000건에 이르렀으나 친일적인 기사는 50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전쟁 말기인 1944년 5월 주중(駐中) 미국 공군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통해서 광복군의 훈련을 도운 정도이다. 이밖에 민간에서는 미국의 유명인사 19명으로 조직된 ��한국친구회��, 한국에 남아 있던 미국선교사들이 활약하여 의회․언론․교회 등을 상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많은 책자를 내어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는 등 홍보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원조하였다.
한국인에게 미국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외교 및 자금조달의 거점이었다. 1908년 재차 미국에 건너간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 등 많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중에서도 1905년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1910년에는 교민자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일인들이 재미 한국인의 지위를 일본정부에 소속시키려는 음모가 있자 국민회는 1913년 미(美)국무장관에게 ��재미 한국인을 일인과 같이 취급하지 말고 한국인에 관한 문제는 한국인단체를 상대로 할 것��을 공문으로 요구하여 승인을 받았으며, 사회법인체로 인가를 얻었다. 이와 같은 국민회의 공인(公認)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법률상의 보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여 국민회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많은 기금을 모으고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기구로는 1919년 대한민국 통신부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가 필라델피아와 워싱턴에 설치되어 임시정부와 횡적인 연락을 가졌다. 그후 1943년 카이로에서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蔣介石]가 극동문제 처리를 위한 회담을 열었으며, 여기에서 한국독립을 보장하는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였으며, 그해 7월 포츠담선언에 의해 완전한 독립이 아닌 북위 38 °선을 경계로 이북을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통치하게 되었다.
3) 광복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맥아더 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남한분할점령책을 발표함에 따라 9월 8일 J.R.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 간의 미군에 의한 남한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하지 중장의 미군 시정방침 발표와 아널드 소장의 미군정장관 취임에 이어, 19일 ��재조선(在朝鮮)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발족하여 남한의 통치에 들어갔다.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던 임시정부의 부인(否認),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對共政策) 등으로 우익정치 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특히 우익진영의 지도자이던 이승만과 하지는 정치적 견해차로 반목이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金奎植)의 중간우파(中間右派)와 여운형(呂運亨)에 의한 좌․우 합작으로 난국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의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넘기기로 정책을 전환하여 1947년 10월 유엔에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 미국대표로 무초(1949년 大使 승격)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 세기 만에 양국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군사비를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하였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1949년 6월 500여 명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미군을 전면 철수하여, 이것이 1950년 6․25전쟁을 유발(誘發)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한․미 관계가 정치․군사․경제면에서 보다 긴밀하게 전개된 것은 6․25전쟁 이후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즉각 군대를 출동시키고 무기를 급송하는 등 결연히 한국에 대한 방어의지를 보이고 38선의 획정을 백지화하여 유엔군을 북진시켰다. 또한 미국은 전시 중의 군사․경제원조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경제원조를 강화하여 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성향 때문에 부산 천도시절부터 대통령 트루먼과 마찰을 빚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한국의 휴전협정 반대 입장 때문에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여,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군사․경제원조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끌어 타결지었다.
1960년대의 케네디 대통령 때는 한국의 군사정변과 박정희정권 출범 과정에서 미국이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존슨, 닉슨, 포드 대통령 시대에는 비교적 소강상태를 이루었으나, 특히 1970년대 후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철수 문제, 인권문제, 박동선사건(朴東宣事件) 등으로 긴장관계가 또 한번 지속되었다. 한편,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를 도왔고, F16기(機) 등 최신예기를 한국에 배치하여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 왔다. 매년 한․미합동의 팀스피리트 작전 등을 통해 양국군의 실전 능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1971년 이후에는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국교개설 이래 한국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방미하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부시․클린턴 대통령이 방한, 양국간의 당면문제를 협의하였다.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 이후 강화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1961년 초까지 한국경제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현재까지도 무역․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 146억 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1960년대까지 제공한 무상원조 47억 달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무상원조시대의 한국경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惰性)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고 차관(借款)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대미수출 의존도는 1961년의 16.6%로부터 1968년에는 51.7%로 그 상승곡선의 정점에 달하여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다각적인 수출정책에 따라 1976년 32.3%, 1989년 12%, 1994년 21.4%로 낮아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면화․옥수수․밀․원피(原皮)․원목․종이․철강 스크랩과 같은 1차 원자재를 대종으로 하고 열전자관 등 전자부품과 그 밖의 중화학제품을 수출하고, 한국의 섬유류․전자제품․철강제품․신발류․기계류․합판․합성수지 등을 수입한다. 그동안의 심한 대미무역흑자현상은 통상마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후 미국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대한수출 증가에 주력하였으며, 1994년 현재 대한수출이 215억 7900만 달러, 수입이 205억 5360만 달러로 무역역조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한편 재미교민은 142만 532명, 체류자는 11만 3045명(199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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