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문학을 시대별로 정리
9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혼란기에 있어서, 서유럽은 그리스도교가 그 정신적 지주가 되어 그리스도교적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진다. 그리하여, 11세기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는 안으로는 각지에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져 그 속에서 충실한 종교생활이 영위되고, 교회와 수도원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꾸며져 로마네스크romanesque 예술이 시작되 며, 이어 학교가 설립되고 도시가 생겨나 상업이 성행하자 주민들은 영주에게 자치권의 인정을 요구한다. 밖으로는 십자군의 기운이 일어 스페인으로 이교도 토벌의 군대를 보내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국민 생활 전반에 걸쳐 창조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 성자전과 무훈가
프랑스 문학도 다른 나라 문학처럼 종교문학에서 시작되고 있다. 11세기경에 성직자들이 썼던 {성자전}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속에 교회가 차지했던 역할을 짐작케 한다.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이란, 우선 사람들은 그 당시의 전투적 교회의 지도 원리에 따라 어떻게 하면 신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순교자가 될 수 있는가, 다음은 왕이나 군주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명예로운 용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신앙과 명예였다.
이것이 그 시대의 행복관이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 바로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이다. 가톨릭교의 기운은 11세기말에 제1회 십자군 운동으로 이어지지만, 그에 앞서 778년에 샤를르마뉴 대제가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피레네 산맥의 계곡 롱스보에서 바스크족의 습격을 당하여 후위부대가 전멸한 사실이 있었던 바, 이에 착안해서 {성자전}을 꾸며낸 것도 당시의 성직자들이다. 즉 샤를르마뉴 대제를 회교도를 토벌하는 신의 전사로, 후위부대에서 분전한 롤랑을 성자로, 바스크족을 이교도 사라센의 대군으로 바꿔놓고 11세기의 사상, 감정으로 사실을 착색하여 십자군의 이상을 구현한 유명한 이 전설을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라는 문학작품으로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중세 불문학에서는 무훈가(Chanson de geste : geste는 역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제스타 gesta에 그 어원을 두며, 청사 내지는 실록의 뜻이다)라 불리며, 오늘날 불문학의 사실상 기원을 이루고 있다.
2) 궁정풍 이야기
12세기 후반에 이르자 귀족의 생활과 시대의 정신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 외부로만 눈을 돌리고 내부의 생활에는 전혀 눈을 돌리 지 않았다는 것,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이상이었던 신앙과 명예 외에도 인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행복관의 변화는 서사시의 세계에서는 설자리가 없었던 여 성에 대한 생각을 일변시켜 버렸다. 따라서 기사는 누군가 한 사람의 담므(dame, 의중의 귀부인)를 선택하고, 그 담므에게서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행동을 우아하게 가지며 훌륭한 공훈을 세워 자기 완성에 힘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사회의 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궁정풍 이야기roman courtois이다.
물론 무훈가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기에 '로망'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 '로망'이란 단어는 현대불어에서 산문의 장편소설을 의미하지만, 중 세에는 장단에 관계없이 운문으로 쓰인 것도 이렇게 불렀다. 그런데 산문소설은 13세기 이후, 본격적으로는 15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 난다. 따라서 중세에 '로망'이라 부르는 것은 형식상 운문이었을 뿐이다.
무훈가는 기사들이 '신과 국왕에의 충성' 혹은 '가문의 명예'를 행동 원리로 삼았던 반면, 궁정풍 이야기roman courtois는 '궁중의 귀부인dame'을 위해 기사들이 무훈을 찾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굴욕마저도 참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궁정풍 이야기, 혹은 기사도 사랑 이야기는 기사 귀족사회의 발달, 봉건제 확립에 따른 성관생활의 안정화, 정의의 세련, 특히 여성의 관념적 신비화, 연애의 정식화 등이 12세기말에 서양 최초로 행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오늘의 레이디 퍼스트 습관의 기원을 이루는 것이다.
3) 소우화와 여우 이야기
연애 감정을 주로 그려내는 로망 외에 독립적 장르인 일군의 로망 이 있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파블리오(fabliaux)라 한다. 12세기 이후의 자유도시의 발달과 이에 따른 시민계급의 대두와 함께 발생한 우스꽝 스럽고 풍자적인 짧은 이야기의 소우화(les Fabliaux)로서, 위의 궁정 풍 문학과는 대조되는 서민 문학이다. 거친 폭소, 세태의 현실적 묘사, 인간의 신랄한 풍자 등 흔히 에스프리 골로아라 불리는 요소가 나타 난다.
한편, 여우 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서민 문학으로 볼 수 있다. '르나 르'라는 이름의 여우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 교활함과 술책을 교묘하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나가며 우화적으로 인간사회와 심리의 현실 을 암시한 이 문학은 가히 중세문학의 걸작이다.
4) 장미 이야기
13세기경의 비성직자 계급인 라이끄(귀족과 시민을 포함한 평신도들)의 지적 관심을 엿보게 하는 우의적 교화문학의 걸작이다. 여기서 장미란 참하고 아리따운 한 아가씨를 말한다. 2부중 1부는 기욤 드 로리스작이고, 2부는 쟝 드 묑의 작품이다. 전자는 연애중심의 궁정문학에 속하며 '사랑의 신'이 우아․청순한 사랑을 권하는 것이나, 후자는 반대로 이를 부정하고 연인이 이성의 설교 앞에 굴복하여 '자연'을 따라 대망의 아가씨 '장미'를 꺾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묑의 합리주의 적 비판정신은 '모랄리스트'적인 것으로 발전하여 결혼제도를 비판하며 우정, 자선, 정의, 진실의 고귀성을 논하는가 하면 소유 및 통치의 기원에 관해 논함으로써 후대의 루소를 연상시킨다.
5) 서정시
미덕의 원천으로서의 사랑을 노래하며 궁정을 떠나 시민사회에서 살았던 죵글뢰르(주에jouer․상떼chanter의 중세어인 jongler에서 나온 말)라 불리는 직업적 음유시인들 가운데 뤼뜨뵈프(Rutebeuf)는 특기할만하다. 그리고 15세기에 이르러 중세 시를 비약시킨 두 시인, 샤를르 도를레앙(Charles d'Orl ans)과 프랑스와 비용(Fran ois Villon)이 있다.
프랑스와 비용은 백년전쟁 후의 무질서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생 의 파란곡절을 체험하고 그것을 시로 반영한 위대한 시인이다. 파리대 학 문학사인 비용은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하던 친구들 틈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여러 번 감옥에도 들어간다.
중세 후기 14세기는 이미 봉건제도가 서서히 무너지고, 이에 대신 하여 왕권과 시민계급이란 두 세력이 대두하여 프랑스는 근대국가로 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는데, 백년전쟁(1337~1453)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전쟁은 필립 4세가 급사한 후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영국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해 온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전쟁은 시종 영국군이 우세하였고, 프랑스 국내의 왕족간의 대립에서 생긴 내란도 박차를 가하여 프랑스의 국토는 황폐화되고 국민은 기아와 질병에 신음하였다.
그러나 이 대전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저 유명한 쟌느 다르크가 나타나 기적적으로 프랑스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프랑스 국가 통일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큰 시련을 격은 15세기 중엽이다.
-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16세기를 흔히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의 시대라고 한다. 르네 상스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이 문화운동은 주지하다시피 미술, 건축의 개화임과 동시에 '위마니스트'라 칭하는 각 분야 학자들의 일종의 실증정신에 입각한 학문연구의 약진이었다.
위마니스트란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얻은 새로운 눈으로 인간 을 생각하고 자연을 보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의 사상, 경향과 주장 을 위마니즘이라 한다. 이 시대엔 프랑스의 종교개혁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문학에 있어서는 라블레, 롱사르, 몽테뉴가 대표적인데, 라블레는 프랑스 최초의 대 장편소설 혹은 대하소설이라 할 5부작 {가르강뛰아와 팡따그뤼엘}을 썼다. 이 작품에서 그는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근대적 인간성과 자연을 극구 찬양했으며, 여기에 역행되는 것은 가차없이 공 격했다.
라블레는 신흥 부르쥬아의 지주이며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기와 청년기를 수도원에서 보냈다. 그는 수도원에서 고전에 흥미를 느 껴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복음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는 이유로 수도 원에서 쫓겨난다. 그는 중세부터 민중에게 널리 전승되던 {가르강튀아 연대기}를 읽고 감동하여 그 구성을 차용하고, 중세의 또 하나의 거인 팡타그뤼엘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썼는데, 그것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출발점이다.
팡타그뤼엘은 목이 말라 항상 마시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라블레의 경우, 그 마시고 싶은 욕구는 술이며, 그것은 지식의 술이요, 지혜의 술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인간은 인간으로서 무한히 향상하고 진보할 수 있으며, 인간이 가지는 힘만으로도 덕에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라블레의 자연사상, 즉 팡따그뤼엘리즘에 의하면 인간은 지식과 이성의 가르침에 의하여 덕을 지향하는 자력본원의 사상이 있다. 라블레 에 의하면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며, 그 어머니인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면 인간은 지고의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 의하면 자연이 란 정신과 물질 두 세계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되고 유전하는 위대 한 에네르기라 한다. 이 자연은 한없이 친절하고 선량하며 풍요롭다. 이것이 거인 이야기인 {가르강튀아와 팡따그뤼엘}의 중심사상이며, 그는 이것을 팡타그뤼엘리즘, 즉 에네르기 숭배사상이라고 말한다.
롱사르는 뒤벨레 이름으로 발표된 유명한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 양}(1549년)이라는 선언서를 낸 프랑스 칠성파 시인들의 주장이었는 데, 이 선언서의 요지는 이렇다. 프랑스어는 그리스-라틴어처럼 위대한 작품을 생산할 가능성을 지녔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 이래의 고풍스런 시형인 발라드를 버리고 고대의 시형인 오드 등과 이탈리아의 소네트로 이를 대치하며 술어, 방언, 신어를 흡수하고 합성어, 새로운 어법, 풍요로운 어휘를 연구하여 시어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몽테뉴는 대표작 {수상록Les Essais}으로 유명하며, 그의 사상은 스토아주의나 회의주의를 거쳐 자기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란 말로 표현되는 그의 회의주의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17세기 파스칼에게 영향을 끼쳐 프랑스 산문문학의 저류라 할 수 있는 모랄리스트적인 문학의 기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험에 입각한 성찰과 귀 납적 사색에 의해 영국의 경험론 철학에 많은 것을 제공하고 또 수필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 17세기 고전주의 시대
17세기의 문학을 보통 고전주의 문학이라 부르는데, 사실상 고전주 의란 명칭은 19세기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그것과 대비시킬 필요가 생겼을 때, 그 이전의 문학을 넓은 의미에서 고전주의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고전주의라 하면 루이 14세 시대의 문학 및 예술, 그러니까 몰리에르, 라씬느, 라 퐁텐느, 브왈로 등 1660년대에 출발한 작가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 공통된 경향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찬미, 엄밀한 구성, 자연스러움과 참다움의 탐구, 절도에의 취미, 심리의 정확한 분석, 문체의 간결함과 다듬음 등이다. 따라서 고전주의의 작가들은 자기들이 양식의 대표자 라 생각하였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들의 특질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에 말레르브가 나타나 지난 세기의 무질서했던 프랑스어를 정리하여 고전주의 시대의 시풍을 준비하였다. 한편 사교계가 활발해지자 살롱들이 생겨나고 이곳에서 창작물이 낭독되며 시의 우열이 가려졌다.
우선 살롱은 종교전쟁 후의 사람들이 조잡하고 거친 마음을 씻으려고 한 욕구와 일치하였고, 다음은 고전주의 정신의 중요한 요소인 절 도와 품위를 낳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이 살롱에서 '교양 있는 사람honn te homme'이 나오고 드디어는 살롱이 문학과 예술을 지배하게 되어 국가의 정신마저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우아한 예절이며 세련된 취미가 육성되고 감정의 분석이 발달하여 후일의 고전주의 문예의 기반이 되는 심리탐구의 길을 열었다. 아울러 언어, 문체의 순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살롱의 이런 취미는 극단화되어 '재인, 재녀'들의 재기가 남발되고 몰리에르의 조소꺼리가 되기도 하며, 이에 대항하는 '뷔를레스끄'(Les burlesques, 익살스런 문학의 작가들)문학을 낳기도 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연극으로 대표되며 꼬르네이유의 {르 씨드}, 몰리에르의 {따르튀프}, 라씬느의 {앙드로마크} 등이다. 연극의 기본 규칙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규범인 '삼단일법칙'인데, 그것은 사건, 시간, 장소의 단일을 말한다. 사건의 단일이란 극의 줄거리가 하나로 압축,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 없애고 극의 핵심이 되는 하나의 사건으로 집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제 한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제약을 가져온다. 이상적으로는 무대에서 공 연되는 시간과, 실제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이 일치되는 것이어야 한 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적어도 사건의 전개를 하루, 즉 24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것 - 이것이 곧 시간의 단일이다. 사건과, 그것이 전개되는 시간의 제한은 장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사건이 단일한 것이고 그것이 짧은 시간 내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장소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막과 막 사이에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은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것이 곧 장소의 단일이다.
라 퐁텐느의 {우화집}은 도덕적 진실을 밝힐 의도에서 운문으로 쓰여진 짧은 이야기들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매미와 개미}, {까마귀와 여우}, {이리와 개}, {떡갈나무와 갈대} 등이다. 그는 동물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가운데 인간 세계의 모든 진실을 암시하고 동물의 모습이나 특성으로 인간 세계의 인물과 특색을 묘사한다. 그는 국왕 귀족들, 부르주아, 사제, 학자, 농민 등 온갖 신분의 사람들과 교만, 비겁, 호기심, 흥미, 허영, 위선 등 갖가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리고 동물마다 그 특성을 파악하여 각 동물에게 인간이 지닌 특색을 부여했다. 사자는 오만함을, 여우는 꾀를, 당나귀는 어리석음을, 토끼는 순진함을, 비둘기는 사랑을, 늑대는 무모한 잔인성을 나타낸다. 사자의 오만한 모습은 야심에 차 있는 국왕을 나타내며, 아첨을 잘하고 교활한 여우는 궁정의 신하들을, 코끼리나 곰은 난폭한 지방 영주들을, 쥐나 개구리는 폭정으로 시달리는 서민층을 나타낸다.
- 18세기 계몽시대
18세기를 보통 계몽 혹은 광명의 세기라고 부른다. 1715년 태양 왕 루이 14세가 사망한 후 반절대주의 사상이 표면화되면서 {페르샤인의 편지}, {법의 정신} 등의 몽테스키외, {깡디드}의 볼테르, {백과전서}의 디드로, 그리고 루소 등이 몽테뉴의 회의주의 사상이나 17세기의 자유사상가의 전통을 이어, 1750~1770년 전후를 정점으로 앙시엥․레짐(구체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대혁명의 기초를 이룬 계몽 문학을 일으킨다.
18세기의 사상은 종교로부터 이성의 해방에 의한 자연과학사상, 민 주주의의 이념, 회의주의, 실증주의, 이신론, 유물론, 무신론 등 여러 단계와 요소로 구성되었으면서도 17세기와는 반대로 반전통적․반권 위적․반주권적․반종교적이었고, 여기에 문학도 주로 사회와 정치와 결부되어 전에 없었던 지적인 경향을 띄면서 당시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들에 의한 사상문학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한 경향의 문학도 병행되었는데, 감성인이 찬양되는 감상적 문학인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루소의 {신엘로이즈}, {고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귀족적이고 인위적인 고전 주의의 이성적 통제에서 벗어난 자연스런 감정이나 정열을 해방시켰 고, 상기 자유사상의 발달과 보조를 같이 하게 되었다.
- 19세기 문학
19세기 프랑스 문학은 그 전체를 개관할 경우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띈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못지 않게 문예사조와 문학운동이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가령 16세기를 르네상스로, 17세기를 고전주의로, 18세기를 계몽주의로 요약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반면에, 19세기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그리고 사실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변천해 가는 문예사조와 문학운동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대혁명을 겪은 이후의 시대로서 혁명은 반혁명으로 끝났지만 프랑스 사회는 완전히 부르쥬아가 통치하게 되며, 2월 혁명에는 이미 노동자 계급이 등장하였고, 1871년에는 파리 콤뮌이 폭발한다. 이러한 정치․사회정세의 변화는 문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독일론}에서 쉴러를 소개하여 낭만주의의 정신적 기반을 준비한 스탈부인, 그리고 샤토브리앙 등을 선구로 낭만주의 운동이 발발, 프랑스 문학 최성기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운동의 서막을 장식한다.
개인의 측면으로 볼 때 낭만주의 문학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개인주의에 뿌리를 박고, 예술과 인생의 자유를 구가하면서 개인의 운명의 비극성, 신과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미약함, 이성에 대한 사랑의 신 비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정 등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감정이 우수와 열정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18세기까지의 문학이 가지는 집단주의적 성격과는 정반대되는 정신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개인주의적 감정, 즉 연애감정, 중세와 외국에의 동경, 증오와 절망, 도취 와 우수 등을 바탕으로 하면서 고전주의와 계몽시대의 이성주의에 항 거하는 낭만주의 정신은 당연히 일체의 옛 규칙이나 속박을 벗어나며 분방한 자유 속에서 색채 짙은 언어와 표현을 구가한다.
낭만주의 시는 우선 라마르띤의 {명상시집}(1820) 출간으로 비롯되 며 비니, 위고, 네르발, 뮈세 등이 두드러진다. 낭만파의 지도적 인물인 위고는 1822년 {오드와 기타 시집}을 펴내고, 1827에는 희곡, {크롬웰}의 서문을 통해 고전주의에 반대하는 선언을 했다. 1830년에는 떼아뜨르 프랑세즈에서 {에르나니}를 상연하여 유명한 '에르나니 사건'을 일으켜서 고전주의파를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위고는 또한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레 미제라블}의 작가이기도하다.
{레 미제라블}은 낭만파 사회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모든 스타일, 모든 소재, 모든 양식이 혼합된 하나의 세계와도 같은 작품이다. 워털루 대전과 왕정복고의 소란을 그린 역사소설이기도 하고, 민중의 영광을 기원하는 인도주의의 시이기도 하고, 혁명가 마리우스를 통한 작가 자신의 자화상적 소설이기도 하고, 저열하고 비속한 당시의 풍속을 폭로한 사실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편을 흐르는 주 요사상은 18세기 철학자들과는 달리 논리와 조직만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없고, 인정과 자비와 연민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 사회는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법률의 기계적인 해석과 적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그들에 대한 변호연설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멸시 당해야 했던 주인공 쟝발장은 그 희생자의 대표적 전형이며, 어머니가 사회의 희생자였다는 인과로 박해를 받아야 했던 코제트, 맹목적으로 법률에 봉사하다가 마침내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하는 쟈베르 등은 자비를 모르는 기계적인 사회가 낳은 희생자들의 표본이다.
낭만주의 작가로는 발자크, 스탕달, 메리메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적과 흑}, {연애론}으로 유명한 스탕달을 살피기로 한다.
스탕달의 본명은 앙리 베일로서 그르노블 출생이며, 일생의 절반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원정 등의 전쟁에 종군하다가 나폴레옹의 실각 후에는 왕정복고를 혐오하고 밀라노에 가서 살았다. 스탕달은 무엇보다도 정력을 예찬한다. 이런 정력예찬은 나폴레옹과 이탈리아를 좋아하게 했다. 한 개인 속에 가장 많은 정력이 응집된 표본을 나폴레옹에게서, 또 열광적인 정열과 격렬한 행동의 저장을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것이다.
스탕달은 위험천만한 대담한 행위와 격렬한 애욕, 다시 말하면, 어떤 인물, 어떤 주의를 위해 목숨을 내걸 때에 느끼는 전율감, 특히 연애의 도취 속에서 느끼는 전율감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생활에 가치를 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정력예찬에서 오는 필연적인 철학이다. 사람들은 이 행복을 추구해야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사회적, 도덕적 배려를 박차 버리고 자유로이 지성을 훈련하고 정열을 발산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베일리즘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이 쥘리앙 소렐(적과 흑의 주인공)이다.
염치나 체면과 같은 도덕적인 척도로 본다면 쥘리앙은 비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골 제재소집 아들로 태어난 출생 때문에 재능과 자질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가문과 금력에 억눌려 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열정과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에 도전하는 쥘리앙 소렐의 삶과 그 양상은, 이 소설을 권력과 재산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부르쥬아 사회의 출세주의의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탁월한 소설로 평가하게 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의 감상성에 대항, 현실의 객관적 관찰에 의하여 진실을 밝히려는 경향으로 특히 {인간 희극}의 발자크에게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1857년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인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나왔다. 이 작가의 태도는 낭만주의와는 반대로 '몰개성', '무감동'에 입각하여 보편적 진실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제를 주로 일상생활, 하층계급의 생활 속에서 구하고 있다.
플로베르는 노르망디 지방의 소도시 루앙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과학과 친숙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탐독하는 작품은 낭만적인 문학작품이었고, 연상의 유부녀와의 희망 없는 사랑, 특히 루이즈 콜레와의 사랑의 병으로 젊음을 불태운다. 그의 작품에는 현대생활을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보바리 부인}, {감정교육}과 역사나 전설을 재현한 {성 앙트완느의 유혹}, {살랑보} 등이 있다.
{보바리 부인}은 루앙 부근 벽촌의 한 시골 의사의 젊은 부인이 권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간 남자들과 사랑의 유희에 빠져든 나머지 타락의 늪으로 추락한다. 화려하고 정열적인 삶의 꿈에 사로잡 힌 엠마 보바리에게는 범용한 남편과 산문적인 일상생활이 견딜 수 없 이 지루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맛 본 그 녀는 자살하고 만다. 플로베르는 이러한 파탄과정을 세밀하고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발표된 해에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여주인공 엠마 보바리의 경우는 소녀 시절의 인상에서 영향을 받는 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엠마 보바리는 일종의 결정론에 의해서 권 태로부터 거짓말, 불륜의 정, 그리고 자살로 내닫게 된다. 결국 엠마 보바리는 자신의 환상의 희생자이며, 감상적인 소시민이라는 그녀의 처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갈망의 희생자이다. 플로베르는 이 개인적인 경우를 관찰하면서 그의 여주인공을 하나의 보편적인 유형으로 만들고자 했다. 로망티크한 꿈에 빠져서 있을 수도 없는 자기를 자기 로 생각하는 경향을 그의 소설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을 보바리즘이라 한다.
졸라는 사실주의 이론을 더욱 극단화해서 실험과학, 특히 생물학의 방법을 소설에 적용하는, 이른바 자연주의 문학이론을 세우고 또한 실천한 작가이다. 소설에 대한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하듯이,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인물을 연구하고, 그 인물이 어떤 특정한 환경, 직업, 교우관계, 우발적인 사건 등에 처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실험하는 것이 소설의 임무이며, 따라서 소설은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자료와 기록에 의하여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졸라의 이런 소설론의 뒷받침은 뗀느의 환경 영향설, 베르나르의 의학 실험론, 다윈의 진화론, 뤼카스의 신경계통의 유전학적 연구 등이며, 이런 소설 이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 바로 20권에 달하는 대하소설, {루공-막까르 총서}이다. 졸라는 소설에 과학적 객관성을 부여하여 관찰․실험․분석․검증 등의 소설 이론을 제창하면서 작중인물들의 수대에 걸친 혈통을 연구하고, 유전의 법칙과 환경의 결정론에 지배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려 했는데, 예를 들면, {목로주점}의 랑티에가 {제르미날}의 주인공이 되고, 나나는 {나나}의 주인공이 된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사회의 병근을 들추어냄으로써 사회의 건강을 유지 또는 회복하려는 나머지 구태여 하층사회의 야수적이고 추악한 면(알콜 중독, 히스테리, 창부, 매독 등)을 묘사하고, 생활을 실제 이 상으로 암준하고 비참하게 왜곡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졸라에게 동조했던 소위 메당(메당은 졸라의 별장이 있던 파리 근교의 이름)그룹의 작가들은 졸라의 {대지}가 발표되자 너무 야수적이고 잔인한 인간관에 반발을 느껴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모파상, 위쓰망, 세라르 등이 메당 그룹에 속한다.
특히 모파상은 {비게 덩어리}를 발표하여 플로베르의 격찬을 받고 일약 문명을 떨친다. 보불 전쟁중 프러시아 군의 점령하의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하려는 프랑스인 일행의 마차가 도중에 프러시아 군에게 억류되자, 일행중의 '비계 덩어리'라는 별명의 창녀를 설득시켜 프러시아 장교에게 몸을 제공하고 겨우 통과 허가를 얻어낸다. 목적을 달성한 일행은 그 창녀에게 냉정한 야유를 퍼붓는다. 야비한 이기주의적 인간성을 통박하는 자연주의적 소설의 본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쟁에 대한 혐오를 테마로 하는 이 소설에는 부르쥬아에 대한 비판, 여자의 비애에 대한 연민, 인간의 육욕에 대한 관찰, 즉 모파상의 문학적 풍토를 이루는 요소의 완전한 융합이 있어 이 작품은 고금을 통한 단편소설의 걸작으로 통한다.
모파상이 다루는 테마는 사생아, 간통, 살인 등 인생의 어두운 면인데, 그것은 무릇 '인간과 관계를 맺는 일체의 것은 전부 문학의 대상일 수 있다'라는 그의 주장에서 나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인생의 단편을 묘사하면서 인간 심리의 깊은 통찰을 통해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 {피에르와 쟝}을 완성한다.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아들에게 버림받고, 하느님에게마저 저버림을 당한 가련한 여인 쟌느의 일생은 로잘리에게 말한 대로 '인생이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쟌느 당사자에게는 애간장이 녹고 뼈가 빠지는 그런 슬픔 없이는 견디어 내지 못하는 세상살이의 한 토막이 아닐 수 없다. 이 박복하고 기구한 여인에게는 무릎에 앉힌 손녀에게마저도 배신당할 운명인도 모른다.
이토록 모파상이 보는 인생은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인생'이 아니라, 철저하게 먹구름이 낀 어두운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래 서 모파상이 그리는 인생의 이면에서 페시미즘을 찾을 수 있다. 인생 이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수도 있고, 미소 속에 행복한 인생일수도, 슬픔 속에 불행한 인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무리 불행한 환경 속 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도 없지 않고, 아무리 행복한 조건이 갖추어진 가운데서도 홀로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여자의 일생}을 어떻게 잃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곧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할 것이다.
다음의 상징주의는 앞서 말한 사실주의, 자연주의 그리고 다음에 언급할 초현실주의와 함께 그 영향이 세계적일 뿐 아니라, 인간의 시학 전반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현대시의 기원을 열었다. 보들레르는 다양 한 감각과 개념 사이에는 공감이 있다 하여, [교감Correspondance]이란 시에서 "오래 계속되는 메아리가 멀리서 섞이듯이, 한없이 넓은 통일 속에서 향기와 색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고 있다", "아이의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의 소리처럼 부드러우며, 초원처럼 푸른빛의 향기"라고 노래하며, 구체적으로 촉각, 청각, 시각이 후각과 서로 화답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보들레르 이후 프랑스 시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 시는 다소간에 그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상징주의 시는 물론이고 현대시도 그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20세기 문학은 각 분야에 거장들을 배출한 19세기 문학을 이어받 아, 풍요로운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질적인 생활면에서 보면, 20세기는 태평성대의 절정에서 개막된 듯하다. 1900년의 만국 박람회가 그 정점을 이루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여러 가지 기적을 실현 시켰고, 편리한 생활과 새로운 오락거리를 제공하였다. 요컨데 프랑스는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그 중추 세력인 부르쥬아는 자신의 긍지 속에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아름다운 시대belle poque'라 부른 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온 지성계가 소요 속에 휩쓸려 대립과 분열을 드러내게 되는데, 한편은 국가주의 전통주의파의 조국 프 랑스 연맹이고, 다른 한편은 인도주의 정의파의 인권옹호 연맹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국민은 정치 도덕 종교 문학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국내의 정신적 위기에 뒤이어 이번에는 대외적으로 '모로코사변'이 폭발되었다. 모로코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민족적 적개심이 다시 일었으며, 이에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열강이 한데 얽혀 지성계는 또 다시 민족적 대립으로 긴장되었다. 이리하여 번영과 평화의 절정에서 20세기를 맞았던 프랑스는 암운에 덮힌 온 유럽과 더불어 전쟁의 지옥으로 내닫게 된다.
베르그송의 반결정론적 순수내면 지속의 세계는 이러한 문학 풍토의 인식론적 기반을 굳혀준다. 그는 물질의 결정론에서 정신을 해방시키고 순수한 내면적 지속의 세계에서 인간성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했다. 직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베르그송은 비합리의 세계를 복권시키는데 추진력을 부여하여 철학과 문학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20세기 전반의 거장들인 발레리, 끌로델, 지드, 프루스트는 이러한 풍토에서 연마된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마지막으로 20세기의 전반의 문학정신은 위기를 맞은 역사상황에 대결하며 개아의식에서 탈각하여 역사의식과 사회 연대의식의 도야를 지향하였다. 루소 이래의 문제인 개아와 사회와의 반정립적 관계를 종합하고 여기에서 모랄리스트적 인간상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인생이란 '이상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끝없는 싸움이다'라고 말한 것은 앙드레 지드이다. 신앙으로 귀의한 친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신의 은총을 부정하여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믿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일관적으로 문제삼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살아야만 후회가 없는가'라고 하는 생의 방법을 탐구한다.
지드의 부친은 남프랑스의 가톨릭 집안의 태생이며, 모친은 북프랑스의 프로테스탕트 집안의 태생인 까닭에, 이 남과 북의 대립, 가톨릭과 프로테스탕트의 대립, 나르씨시즘과 코뮈니즘과의 대립 등 지드의 작품은 그러한 대립초극의 예술화이다. 그러면 이러한 점을 {좁은 문}을 통해 보기로 한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제롬은 소년 시절부터 여름을 숙부의 집에서 지낸다. 거기에는 두 살 위인 알리싸와 한 살 아래인 쥘리에트가 있다. 숙모는 어린이의 눈에도 좋지 않게 보이는 인물이다. 제롬은 성장 함에 따라 그러한 숙모의 그림자가 알리싸의 마음을 그늘지게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알리싸를 불행에서 구하기로 결심한다. 두 젊은 이의 마음은 청교도적 신앙을 높이는 것에 의하여 더욱 결부된다. 어머니가 죽은 후, 그는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하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도 있어서 알리싸에게 구혼을 하는데, 그 여자는 이대로가 행복하지 않느냐고 그를 타이른다. 그는 파리에서 그 여자에의 정신적 사랑 속에서 지낸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 돌아온 그는 쥘리에트에게서 알리싸가 그와 쥘리에트의 결혼을 바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다. 그러나 자기를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쥘리에트는 반항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린다.
이탈리아 여행, 그리고 군에의 입대 등 헤어져 있을 때는 알리싸에게서 사랑에 넘치는 편지가 전해져 오는데, 만나면 그 여자의 신앙은 깊어만 간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줄을 모른다.
3년 후 다시 돌아온 그는 그 여자를 포옹하지만 그 여자는 '둘의 사랑을 상처 입히지 마세요'라고 하며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집을 나간 그 여자는 1개월 후에 죽는다.
남겨진 일기에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좁은 문'을 통하여 신에게로 나아가는 투쟁과 그리고 그 괴로움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의 착상은 1891년이지만 1909년까지 네 번이나 고쳐 쓰여 졌다. 신을 부정하며 생의 환희를 추구하는 {배덕자}의 미셀과 사랑의 기쁨을 희생하여 신에게로 나아가는 알리싸의 두 주인공, 그리고 두 주인공이 완전한 해결에 이르지 못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로소 작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양 차 세계대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기존의 진리나 사회제도, 경제조 직 등을 파괴함으로써 인간들은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불안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갈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거기에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다다이즘은 전위적 문학운동으로 전래의 시를 우선 철저히 부정하는 데 주력한 움직임이다. 아무런 뜻을 갖지 않은 말이라 하여 선택된 '다다'를 앞세운 다다이즘은 1916년 취리히의 한 다방에서 트리스탕 차라에 의해 태동되었는데, 그 목표는 현대 사회에서 공인 받고 있는 도덕적, 사회적, 미학적 가치들의 완전한 전복이었다. 다시 말해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기성관념을 파괴하자는 혁명이었으나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반역한다는 파괴주의 때문에 운동은 해체된다.
그후 뒤를 이은 초현실주의는 현실이란 것을 부정하고 보다 높은 정신적 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다다이즘과 그리 멀리 떨어진 경향은 아니다. 보다 높은 정신적 현실이란 표면의식 밑에서 엄청난 비중으로 잠재해 있는 꿈과 무의식, 자유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이 시도한 절대적 자유를 위한 거부와 파괴의 터전에서 꽃을 피웠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논리적 사고 이전에 있는 혼돈 상태 또는 논리적 사고를 벗어난 모든 의식 상태, 이를테면 원시인들의 신화, 꿈과 환상, 광기, 불가사의, 정신병 환자들의 환각 증세 같은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와 오류,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라는 전래의 구별이 부질없다 하면서 정신병 의사들이 말하는 과대망상증, 정신분열증, 히스테리 등의 현상을 연구했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선례에 따라 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연상작용을 기록하려 했다. 그들이 사용한 '자동기술법'은 계시적인 무질서 속에서 부조리함이나 부적절함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해방된 의식 속에 쌓이는 문장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다.
"말이건 글이건 아니면 그 어떤 수단에 의해서건 사고의 진정한 작용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자동현상, 이성의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고,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어떤 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고의 받아쓰기이다."
랭보와 다다이즘의 아폴리네르, 짜라를 거쳐 제1차 대전 후에 나오는 쉬르레알리즘의 기수들인 부르똥, 아라공, 엘뤼아르 등은 '자동기술법'에 의한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여 미술,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영토를 개발, 확장하면서도 실천적 진리를 찾아 과격한 정치사상 운동에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히 가담하는가 하면, 민중의 시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아폴리네르는 낭만적인 경향의 작가이며, 시에 있어서 혁신자로서, 선구자로서의 변모과정을 보여준 시인이다. 1913년 발표된 {알콜Alcools}은 그의 독창성이 드러난 시집이다.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말 같은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옮겨 적는 등 잡다한 모티프들을 무질서하게 병렬시켜 회화에 있어서 입체파 미학을 시에 적용한다. 그리고 1918년에 발표된 {칼리그람Calli- grammes}에서는 아무렇게나 배열한 단어들, 야릇한 이미지, 비둘기와 분수 등의 형태를 이루는 글자들을 배열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단어가 가지는 일상적 의미를 박탈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뛰어넘게 한다.
그는 예술이란 외면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부호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쉬르레알리즘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야 하지만 '사진사처럼 자연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중에서 [미라보 다리]는 널리 알려져 있다.
프루스트는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7부 15권)에서 '표면적 자아'와 숨어 있는 '심연의 자아'를 구별하고 심연의 자아의 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와 비극적인 인간 조건을 파헤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병으로 환자 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유년기를 연장하는 듯한 삶을 살았다. 평범한 문인생활 속에서 전개되는 내적 드라마와 그가 영구소멸을 예견하고 자신의 드라마와 함께 작품 속에 남기려 한 상류계급 사교계의 여러 면모와 풍속도가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바탕이 된다.
1830년 이후 지배적인 장르였던 소설분야에 있어서도 역사의식과 사회 연대의식이 만연했다. 예컨대 근대 세계의 광대한 종합적 묘사를 시도한 사회 작가 뒤아멜, 마르땡 뒤 가르, 행동주의 작가 말로, 쌩 떽쥐페리 등의 문학을 들 수 있다. 또한 대전 후의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 부보아르와 부조리의 작가 까뮈의 문학세계도 같은 테두리에 포함된다.
말로가 자기 행동의 장소를 동양에서 찾고 있을 때 쌩 텍쥐페리는 파일로트로서 그것을 하늘에서 찾는다. 그는 어느 작품에서도 용감하고 진지한 책임과 성실성, 공통적 고난과 위험을 겪는 자에게서만 느끼는 인간 상호간의 연대의식, 전 인류에게 결부되는 개인의 공헌, 소박한 어린이의 마음 속에만 있는 시정과 구상적인 세계를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문체로 표현했다. 시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깊은 인간 관찰과 신랄한 사회비평을 담은 {어린 왕자}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프랑스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하고 세계에 널리 독자를 가진 것은 실존주의 문학이다. 실존주의 문학이 그 융성을 보인 것은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한 유럽인들에게 인간존재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기본적인 명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보다 앞서는 것이며, 인간은 자기의 의지에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연히 태어나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되려고 하는 것은 다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하며 어떤 책임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극히 자유로운 모스븡으로 태어난 인간이 그 자유를 잘 구사하여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확립해야만 된다는 것이 실존주의 문학에 깔린 삶의 태도이다.
그러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규명과 삶의 태도를 다룬다는 의욕에 의하여, 사르트르와 까뮈의 문학 작품은 기성문단의 천박함과 진부함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20세기 중엽 프랑스 문학에 일종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까뮈의 {이방인}, {시지포스의 신화}는 그의 부조리 철학의 제창이다. 부조리 철학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많은 합리주의 철학을 신봉하는 낙천가들은 이 우주와 세계가 진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모순이 있어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혼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세상은 살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부에는 일체의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바라는 요구와 행복을 원하는 욕구가 있다. 그 요구와 욕구는 진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한편에는 우주의 혼란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통일을 바라는 내부의 요구가 있을 경우, 이 두 개를 승인하고 그것을 대립시켜 서로 접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의 삶의 방법이 발견될 것이 아닌가, 그 삶의 방법이 바로 부조리의 철학이다. {이방인}은 그의 부조리 철학을 소설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950년 이후에는 소설변혁의 선구적 시도로 실험적이라 할 종래의 소설요건을 완전히 파괴한 작품, 즉 새로운 소설(누보 로망) 또는 반소설(앙티 로망)이 나타난다. 전통적 소설에서 보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줄거리의 전개, 작중인물의 전형, 심리의 묘사, 테마의 명확성과 작자의 조물주적 시점 등 일체의 것을 배제해 버리는 소설기법이다. 누보 로망의 새로운 소설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로는 싸로트, 로브 그리에, 비또르, 씨몽 등이 있다.
위고 (1802~1885) Victor Hugo
레 미제라블
미리엘 대주교는 부드러운 자애의 위력으로 석방된 죄수 쟝 발쟝을 다시 선행으로 이끈다. 그런데 한 불운한 행동(쟝 발쟝은 자기를 귀찮게 하는 한 소년을 쫓았는데 그 아이는 한 잎의 은전을 버리고서 도망친다)때문에 이 전과자는 곧 종신형을 치뤄야 될 누범자가 되어버린다. 그는 마들렌느씨라는 가명으로 명예회복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공장을 세우며 불행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남성의 에고이즘의 희생이 된 불쌍한 여인 팡틴느에게 동정을 기울인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광신적인 경찰관 쟈베르 형사만이 의혹의 눈으로 그를 감시한다.
어느 날, 마들렌느씨는 8년 전부터 수배중이던 전과범 쟝 발쟝이 당사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무서운 갈등이 그의 마음에 일고 그 결과, 그는 무고한 사람을 구해주기 위하여 자수를 하고서 다시 징역을 치른다. 그는 감옥을 탈주한 후, 팡틴느의 딸인 어린 고젯트를 맡아서 파리로 돌아온다. 바로 뒤이어 형사 쟈베르도 나타난다. 그들은 간신히 쟈베르의 눈을 피해 한 수도원 속에 은신처를 찾는다. 그러는 동안에 어린 고젯트도 성장해서 민중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양가집 자제인 청년 마리우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청년은 쟝 발쟝이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정을 쏟은 것이다. 파리가 바리케이드로 뒤덮여 있던 어느 날, 쟝 발쟝은 빼앗은 한 장의 편지를 보고서 이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게 된다. 쟝 발쟝은 마리우스가 비밀결사 [라.베.쎄]의 모든 동지들과 싸우고 있는 바리케이드로 가게 되고 부상을 당하여 정신을 잃고 있던 그 청년을 발견하여 그를 어깨 위에 업고서 하수도를 통하여 [레비아탕의 창자 속]으로 운반하여 구조한다. 마리우스가 완쾌되자 결혼식이 거행된다. 쟝 발쟝은 코젯트에게 지참금을 충분히 주고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고서 이후로는 그들과 떨어져서 살겠다는 결심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기 곁에 고제트도 없이 쓸쓸히 죽어 간다.
노트르담 드 파리
아름다운 16세 집시 처녀 라 에스메랄다는 노트르담의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의 눈길을 끈다. 클로드 프롤로는 격렬한 정욕을 불태우는 남자였다. 그는 자기에게 헌신적인 노트르담의 종지기인 기괴한 꼽추 콰지모도를 시켜서 그녀를 유괴하도록 하지만, 그녀는 근위순찰 대장인 미남 페뷔스 드 샤토페르에 의해 구출된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연정을 느낀다. 클로드 프롤로는 그 두 사람을 염탐하고 노리다가 비열하게도 페뷔스를 칼로 찌르고 라 에스메랄다를 체포케 한다. 모든 것이 그녀의 살인죄를 증명하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역시 이 처녀를 사랑하고 있는 콰지모도가 그녀를 빼내어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피난처인 성당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는 이 피신한 처녀의 주변을 배회하는 클로드 프롤로를 경원하면서 또 부랑배의 무리가 그들의 자매를 탈환하기 위하여 성당을 습격해 온 것을 단신으로 막아낸다. 이렇게 결렬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복면을 한 클로드 프롤로는 라 에스메랄다를 구원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끌어낸다. 그러나 그녀는 구원자가 클로드 프롤로인 것을 알고는 또다시 그를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순찰대를 불러오기 위해 그녀를 한 은둔 수녀에게 맡긴다. 이 은둔 수녀는 집시들을 죽도록 미워하는데, 그것은 옛날에 집시들이 그녀의 어린 딸을 훔쳐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은둔 수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로잡혀 있는 처녀가 바로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찰대는 그 은둔수녀로부터 에스메랄다를 다시 빼앗아 교수형에 처하려고 맹렬히 싸워야만 하였다. 고뇌로 인해 미쳐버린 콰지모도는 클로드 프롤로를 성당의 높은 곳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집시 처녀의 주검위에서 죽는다.
스탕달 (1783~1842) Stendhal
적과 흑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쥘리엥 소렐Julien Sorel은 어떤 일이 있어도 출세하고야 말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청년이다. 그는 출세의 길 중에서 가장 화려한 길이 군인(Rouge, 적)과 성직자(Noir, 흑)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그 당시에 군인으로 출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서 성직자로 출세하려고 생각한다.
라틴어를 배우고 익힌 쥘리엥은 명문 드 레날De R nal 댁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레날 부인을 유혹하며, 그 일로 명문가에서 쫓겨난다. 또다시 그는 신학교 은사의 소개로 드 라 몰De la M l 후작 비서로 그의 집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그의 딸 마틸드Mathilde를 유혹한다.
드디어 마틸드와의 결혼이 약속되고 귀족의 칭호와 용기병 중위의 사령까지 받게 되어, 쥘리엥은 오랫동안 바라던 지위와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갑자기 레날 부인의 질투와 비방의 편지가 날아와서 그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분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권총 2발로 레날 부인을 쏘아 사살미수의 죄를 범하고 체포되어 단두대에 오른다. 그의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레날 부인은 충격으로 병이 들어 죽는다. 결말에서 마틸드는 잘린 쥘리엥의 머리를 훔쳐다가 화려한 장례식을 치뤄준다.
플로베르 (1821~1880) Gustave Flaubert
보바리 부인
샤를르 보바리Charles Bovary는 중학교 시절부터 그리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착실한 소년이다. 당시 정규 의사 면허증 없이 의업에 종사할 수 있는 보건관이 된 샤를르는 개업을 하기 위하여 모친이 시키는 대로 돈 많은 연상의 미망인과 결혼하지만 별로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그 아내와 사별한다.
그리고 그는 왕진해 준 집 루오Rouault 영감의 호의로 그의 딸 엠마Emma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 엠마는 미모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상류 부르조아지의 딸들이 가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까닭에, 그녀의 머리속엔 소설책에서 읽었던 그대로의 로망티크한 몽상으로 가득차 있다. 그녀는 결혼 후 샤를르의 평범함과 어리석음에 크게 실망한다. 시와 정열과 공상 따위는 샤를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이 엠마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그녀는 현재의 지루한 생활을 벗어나 소설에서 읽었던 달콤한 연애를 꿈꾸거나, 파리와 같은 화려한 도시생활을 동경한다.
용빌르Yonville로 이사한 후, 엠마는 법학도 레옹L on을 알게 되어 서로 호감을 가진다. 그러나 레옹이 법률을 공부하러 파리로 떠나 버리자, 엠마는 크게 고독을 느낀다. 그 고독과 남편에 대한 불만에서 벗어나려고 그녀는 아들을 낳기를 기대했지만 딸을 낳았다. 그 때, 실의에 빠진 부인 앞에 레옹 대신 머리는 좋지만 성격이 난폭하고 호색가인 시골 신사 로돌프Rodolphe가 나타난다. 순진한 엠마는 로돌프에게 반해 그의 미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엠마는 점점 타락해 간다. 한때 남편 샤를르를 도와 그를 출세시켜 보려고도 하지만 남편의 수술 실패와 무능함에 더 실망하고 로돌프와 더 깊은 관계에 빠지다가 결국 로돌프에게 버림 받는다.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생각해 보지만 죽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루앙Rouen 극장에서 첫사랑이었던 레옹을 만나 곧 깊은 관계를 맺는다. 보바리 부인은 레옹에게 잘 보이려고 큰 빚을 지고 결국엔 재산을 차압당하고 만다. 부인은 마침내 음독자살해 버린다. 남편 샤를르는 딸을 위해 살다가 아내의 행동에 관한 추문이 퍼지자 이에 충격을 받고 그도 역시 음독자살해 버린다.
졸라 (1840~1902) Emile Zola
목로주점
여주인공인 제르베즈는 세탁부로 가볍게 발을 저는 비교적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녀는 고향 프랏상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모자장이 랑티에와 함께 파리로 왔지만 두 달 후에 그 남자에게 버림을 받는다. 젊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세탁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얼마 후 성실한 기와장이 쿠포와 결혼했다. 4년 동안은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그간에 안나(나나)라는 딸도 낳고 약간의 돈도 모았다. 그녀는 저금한 돈으로 세탁소를 차릴 꿈을 꾼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쿠포가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바람에, 얼마 안 되던 저금도 곧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대장장이 구제의 호의로 그녀가 꿈꾸어 온 세탁소를 구우트도오르가(街)의 어느 커다란 집 아래층에 개업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애교있는 장사솜씨 때문에, 가게는 번창하여 마침내 심부름꾼을 두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오랜 요양 생활 때문에 게으름병이 생긴 쿠포가 주벽이 생겨 선술집을 돌아다니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주에 빠져 그녀가 버는 돈은 모조리 남편의 술값으로 나갔다. 불행은 이리하여 발 밑에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날 술에 취한 쿠포가 한 사나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것은 뜻밖에도 파리에 오자 바로 그녀를 버린 랑티에였다. 랑티에는 이미 정부와 헤어지고 경기가 좋은 그녀의 가게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랑티에는 그녀의 집에 눌러 붙어 있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내 두 건달과 아이들을 데리고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절망에 빠져 버린 그녀는 어느날 밤에 다시금 랑티에에게 몸을 맡긴다. 추문은 퍼져가고 두 남자의 추행은 더해 갔으며, 그녀의 집은 지옥이 되었다. 그녀에 대한 연정을 남몰래 품어 온 대장장이 구제가 이 지옥에서 빠져나와 외국으로 가자고 제의해 왔지만, 그녀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상대를 하지 않는다.
마침내 가게는 파산했고 그녀는 이미 일할 기력도 없이, 눈앞에 닥치는 굶주림을 보면서 누워만 있었다. 쿠포는 선술집에 틀어박혀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가 되어 버린 그녀는 절망과 고독 속에서 술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두 사람이 취해서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쿠포에게 알코올 중독의 증세가 나타났고, 이내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미쳐서 죽어 버린다. 그리고 마흔이 겨우 된 제르베즈는 형편없이 추해지고, 돌봐 주는 남자도 없이 굶어 죽는다.
모파상 (1850~1893) Guy de Maupassant
여자의 일생
쟌느는 성심 수녀원에서 루앙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열일곱 살이다. 그녀의 부친은 대혁명을 증오하는 귀족으로 루소의 자연 종교사상을 쫓아, 심장비대증 때문에 뚱뚱해진 모친의 눈물을 무릅쓰고, 딸을 선량하고 따뜻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서 열두 살 때 수도원의 기숙사에 들여보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후 잔느는 청순한 꿈과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친은 쟌느를 유모의 딸인 로잘리와 함께, 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레 푸프르의 저택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했다. 소녀는 아직 보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그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든 적당한 남자와 만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삐꼬 신부가 여자들의 이상형이긴 하지만 남자들에게는 불쾌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한 라마아르 자작인 줄리앙을 그녀에게 소개한다. 쟌느는 금방 이 남자에게서 이상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결혼해 버린다. 결혼 생활이 현실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던 쟌느에게 곧 환멸이 찾아온다. 게다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남편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남성의 추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재산의 관리 등을 한 손아귀에 쥐고 쟌느에게도 쌀쌀하게 굴었다.
그 다음해의 겨울 아침, 유모의 딸 로잘리는 뜻하지 않게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줄리앙의 자식이었다. 로잘리는 쫓겨나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쟌느도 초여름에 포올을 조산했으며, 사랑에 환멸을 느끼고 희망을 잃어버린 지금은 '극성스런 어머니'로 변했다. 아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는 쟌느는 다음해 여름에 뜻하지 않은 일로 줄리앙과 푸르빌 백작 부인과의 부정을 알았지만 체념할 수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고, 또 아내의 부정을 안 백작은 그 현장에서 줄리앙과 백작부인을 살해한다. 쟌느는 계집애를 사산하여 남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쟌느는 아버지와 그의 누이동생 리종 고모와 함께 외아들 포올의 '세 사람의 어머니'가 되어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눈금으로 새기면서 단조로운 평화 속에 세월을 보냈다. 포올은 열다섯살이 되자 중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수사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이미 '어머니의 아이'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생활을 시작하여, 도박으로 빚을 지고 여자와 놀아나 퇴학당한 후에 여자를 데리고 잠적해 버렸다. 아버지도 고모도 모두 죽었다.
고독해진 쟌느에게 24년만에 로잘리가 돌아왔다. 로잘리는 남편과 사별하였는데, 그 아들이 훌륭한 농부가 되어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포올의 방탕 때문에 저택도 잃고만 쟌느는 과거의 추억에 살며 탕아의 귀가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포올은 그의 정부를 잃었지만, 아이만 어머니 손에 맡기고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로잘리는 "세상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하고 말하며 쟌느를 위로한다.
로스탕 (1868~1918) Edmond Rostand
씨라노 드 베르쥬락
사건은 프레시오시테의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가스코뉴의 청년귀족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라노 드 베르쥬락과 크리스티앙은 함께 시라노의 아름다운 사촌자매인 멋쟁이 재치꾼 록산느에게 열중한다. 그러나 록산느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시라노의 감정도 모르고 자신은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고 있다고 사촌인 시라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 이후로 시라노는 도처에서 크리스티앙을 보호해 주게 된다. 웅변술이 도무지 없는 그를 위해 그 이상의 것도 도와준다. 즉 시라노는 록산느에게 보내는 크리스티앙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고, 또 정원의 어둠 속에서 그를 대신하여, 록산느에게 열렬한 사랑의 대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록산느는 그 대사가 크리스티앙이 직접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라노는 아라스를 앞에 둔 전투의 혼전 중에 크리스티앙을 구해내지 못하고 크리스티앙은 전사한다. 바로 그 때 크리스티앙은 비로소 록산느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시라노의 격정적인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시라노도 역시 록산느를 열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록산느는 사랑을 잃은 슬픔과 비탄에 잠겨서 수도원에 은둔해 버린다. 그러나 시라노는 15년 간을 그곳에 다니면서 그녀에게 크리스티앙의 얘기를 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마침내 그의 비밀은 드러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시라노는 마침 그날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록산느의 다정스러운 고백을 들으며, 긍지를 끝까지 잃지 않은 채 죽어간다.
지드 (1869~1951) Andr Gide
좁은 문
화자 제롬은 어려서부터 자기보다 두 살 위인 외사촌 누이 알리싸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두 사람을 결합하는 감정에는 신비스런 것이 섞여 있다. 그것은 격렬한 하나의 위기를 지나친다. 알리싸는 자기의 동생 쥘리에트가 역시 제롬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쥘리에트는 언니처럼 희생 정신을 갖고 있어서 알리싸의 행복을 훔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자기보다 훨씬 연상의 구혼자와 결혼한다. 만약 이런 일만 없었던들 알리싸는 쥘리에트를 위해 양보했을 것이다. 이제는 알리싸와 제롬을 떼어 놓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알리싸의 한 없는 침묵만 제외하곤 말이다. 그러나 알리싸는 몸을 피하더니 이윽고 자기는 행복보다는 성스러운 것을 바라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는 제롬의 눈에 비친 알리싸, 그가 사랑하던 알리싸의 환상을 깨뜨리고 '시적취향이 없는' 알리싸가 되려고 한다.
3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제롬은 알리싸를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그녀는 다정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잘 있어요, 사랑하는 이여,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최상의 것이.' 한달 후에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일기는 그녀의 고통의 비밀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녀는 제롬을 사랑하였고 제롬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교도로서 완전성을 염려하고, 이 완전성은 사랑에 대항하는 것으로써 얻어진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또 그녀가 추구한 것은 자신의 행복보다도 차라리 제롬의 행복이었다.
그녀는 제롬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음으로써 제롬이 혼자서 성서에 쓰여 있는 '좁은 문'쪽으로 가는 것을, 즉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는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프루스트 (1871~1922) Marcel Proust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7부 15권)에서 프루스트는 표면의 '피상적 자아'와 심연의 '내면적 자아'를 구별하고 내면적 자아의 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와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파헤친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지병으로 환자처럼 생활함으로써 유년기를 연장하는 듯한 삶을 살았다. 평범한 문인생활 속에서 전개되는 내적 드라마와 작가가 영구소멸을 예견하고 자신의 드라마와 함께 작품 속에 남기려 한 상류계급 사교계의 여러 면모와 그 풍속도 - 이것이 그의 작품의 바탕이다.
① {스왕댁편}(2권) - 마드렌느 과자를 차에 적셔 몇 모금의 차를 마시자, 옛날 어린 시절에 똑같은 마드렌느 과자와 차를 마신 경험이 되살아남으로써 잊혀진 그 당시의 경험이 현재 속에 소생된다. 그리하여 한 잔의 찻잔 속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을 배경으로 한 '나(마르셀)'의 모든 체험을 비롯하여 '되찾은 시간'에 이르는 16권의 작품세계의 실마리가 한 잔의 차로부터 풀려나가는 것이다.
옛 고향 콩브레Combray에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교인인 스완(부르주와 사회의 대표자) 댁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마르셀의 할아버지와 친구였기에, 어린 마르셀은 스왕이 행실나쁜 여자 오데트를 아내로 둔 까닭에 사교계에서 쫓겨난 사실을 안다. 또 다른 이웃에 게르망트(귀족사회의 대표자) 공작의 성관이 소년 마르셀의 공상을 자아내게 한다.
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유혹과 환상, 차츰 성장하며 경험을 넓힘으로써 그 환상의 세계를 침입하여 영역을 넓혀가는 현실의 세계, 현실이 환상의 세계를 정복하고 좁혀감에 따라 환멸의 잔재를 뒤에 남긴다. 몇해 후 소년의 가슴에는 파리에서 다시 만난 스왕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이 처음으로 싹튼다.
②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3권) - 마르셀은 종종 스왕 댁으로 질베르트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 역시 첫사랑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잊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해수욕장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의 한 소녀 알베르틴느에게 마음이 끌리고 마침내는 그 소녀에게 고정된다(콩꾸르상 수상).
③ {게르망트댁편}(2권) - 청년 마르셀은 파리의 사교계에 출입하며 게르망트 공작부인에 열중하여 그녀의 살롱에 등장할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죽음, 알베르틴느와의 접촉으로 잠시 사교계의 야심을 잊는다. 드디어 공작부인의 살롱에 소개되어 호화로운 귀족사회를 관찰한다.
④ {소돔과 고모라}(3권) - 온순함과 잔인함이 섞인 공작의 동생 샤를뤼스가 변태적인 성격과 거동을 하는 것은 '소돔의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음악가를 사랑하고 질투에 괴로워한다. 그밖의 다른 살롱들, 그중에도 부르주와 베르뒤렝 부인의 살롱에 호기심이 끌린다. 마르셀은 알베르틴느와 헤어지려고 하여 해수욕장으로 가서 소녀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그는 알베르틴느가 '고모라의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⑤ {갇힌 여인}(2권) - 마르셀은 알베르틴느와 파리에서 동거생활을 한다. 그는 그녀를 버리고 자유를 되찾고 싶지만, 그녀의 악습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시를 엄하게 하여 둘 사이는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자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불안과 질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⑥ {자취감춘 여인}(1권) - 마르셀은 알베르틴느를 찾다가 그 여자가 변사한 사실을 알게된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역시 그는 과거의 행실에 대한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⑦ {되찾은 시간}(2권) - 그녀는 시간의 망각 속에 파묻혀지며, 마르셀은 요양생활로 들어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종전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 시대는 이젠 끝나고 신흥 살롱이 열린다. 거기에 초대를 받은 마르셀은 울룩불룩한 타일에 걸려 넘어질뻔 할 때, 옛날 어머니와 여행 중 똑같은 경험을 한 일을 연상하며 행복에 잠긴다. 시간에 의하여 좀먹힌 친지들의 얼굴을 시간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마르셀은 예술에 몸을 담아 소설을 쓰려고 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여기서 처음으로 과거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이다.
[중심사상] - 프루스트가 보여준 집념은 자아의 단절, 변모, 무상에 대한 것이다. 첫째로 피상적 자아는 시간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고 굳어버리는 결코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외면적 자아이며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 수 없는 자아이다. 둘째로 내면적 자아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의식의 주체로서의 자아이며, 시간을 초월할 수는 있으나 잠시도 고착시킬 수 없을 뿐더러 망각으로 하여금 무로 돌아가는 유전무상한 자아이다. 결국 양자가 모두 육체적인 죽음으로써 무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프르스트를 사로잡는 것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자아의 단절이다. 즉 현재의 자아로 보면 과거의 자아는 이미 죽은 것이며, 삶이란 결국 변모와 망각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자아의 일부가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절부절 못하며 질베르트를 그리워하는 마르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이 식어버리고 질베르트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마르셀로 변한다. 이 경우 전자와 후자는 이미 딴 사람이며, 후자에 있어서 전자는 이미 죽어버린 마르셀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변모와 죽음의 연속인 다수의 자아에게, 동일한 자아의 지속으로서의 통일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소위 '뜻하지 않은 추억'이다. 어린시절 마르셀이 침실에서 듣던 방울소리는 10년 후에 우연한 계기에 추억에 잠긴 마르셀의 귀에 생생히 들려온다. 수없는 변모를 거치는 동안에도 방울소리는 여전히 마르셀 속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뜻하지 않은 추억'은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순간을 현재에 되살려놓고 현재의 자아도 역시 그 과거의 순간을 다시 살기 위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그것을 맞아들이고 그 속에 잠긴다는 것이다. 추억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를 되살려놓듯이 작품은 작자의 죽음을 넘어 그의 삶과 감정과 의식세계를 독자들의 가슴 속에 소생시킴으로써 적어도 육체적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로 하여금 다가오는 죽음과 분초를 다투며,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게 한 힘, 그를 문학의 순교자로까지 높여준 원동력은 실로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그의 예술관에서 나온다.
쌩텍쥐페리 (1900~1944) Antoine de Saint-Exup ry
어린 왕자
엔진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혼자 절망하고 있을 때,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양의 그림을 그려 주세요"라고 말한다. 깜짝 놀란 비행사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결과, 그 어린이는 다른 별에서 온 왕자임을 알게 된다.
그의 별은 방 만큼의 크기인데, 거기에서 어린 왕자는 한송이 장미꽃과 함께 살고 있다. 어린 왕자는 그 장미꽃을 돌봐 주지만 장미꽃의 심술에 참을 수 없어, 왕자는 그 별을 떠나 우주의 여러 별을 산책한다. 처음 도착한 별은 왕이 혼자 거만한 체하고 있다. 다음 별에는 자랑꾼이 박수를 받고 있다. 또 다음 별에는 사업가가 계산만 하고 있다. 또 다른 별에는 점화부가 가로등을 켰다 껐다 하고 있다. 마지막 별에는 지리학자가 지구라는 큰 별을 가르쳐 준다. 어린 왕자에게는 어른이란 정말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지구로 내려온 어린 왕자는 산에 올라가 '나는 홀로 있다'라고 외치자 메아리는 '나는 홀로 있다, 홀로 있다'라고 응답한다. 계곡에서 자기의 별에 남겨 두고 온 장미꽃과 똑같은 장미꽃이 있는 것을 보고 어린왕자는 깜짝 놀란다. 거기에 꾀많은 여우가 나타난다. 그 여우는 보통 여우와 다른 여우가 되는 것이고, 어린 왕자의 별에 있는 장미꽃도 보통 장미와 다른 장미꽃이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뱀과 친구가 된다. 비로소 어린왕자는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에 대한 사랑이 모자랐음을 깨닫고, 뱀에게 물어달라고하여 자기의 별로 되돌아간다. 비행사는 지상에 남은 어린 왕자의 유체만을 부등켜 안는다.
까뮈 (1913~1960) Albert Camus
이방인
알제리의 평범함 회사원 뮈르소Meursault는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매장에 입회한 후, 다음 날 바닷가에서 여자와 놀고 영화 구경을 한다. 그리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데, 그는 결혼이나 사랑은 "요컨데 대단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는 것이다.
어느날, 단지 '태양 때문에' 하찮은 일로 다투다가 아라비아인을 살해하게 된다. 우연한 운명의 장난에 의하여 무의미한 살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생을 아무 생각없이 지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살인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갑자기 바뀌고 그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는 독방 속에서 명상한다. 이윽고 어제까지 편안히 살아 온 세계에 대해 그는 자신이 무연의 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재판관은 그가 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사회 일반의 선악을 판단할 줄 모르는 사나이이며 위험한 인물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 집행일까지의 수일간은 뮈르소에게 강렬히 생을 사는 나날들이 된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부조리와 거기에 대립하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그때의 그의 존재는 위대한 우주 만큼이나 큰 것이다.
이 소설은 전후에 세계적으로 널리 읽혀 졌는데, 그것은 뫼르소의 고독감이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크며, 작품의 배후에서 주인공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부조리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낭만주의시
알퐁스 드 라마르틴 (1790-1869)
샘 솟듯 흘러나오는 감정의 토로, 호수,숲,골짜기를 거닐며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실에 대한 실의로 시작하여 체념 혹은 희망으로 끝나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시는 1820년대의 프랑스 독자를 열광시켰다.
라마르틴느는 프랑스 대혁명 다음 해인 1790년 마콩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으로 아버지가 혁명에 휩쓸려 감옥에 들어갔다 1794년 풀려나자 더 이상의 화를 피하기 위해 밀리라는 시골로 이사를 하였다.
1815년 루이 18세가 복위된 후 1820년에 그는 외교관으로 이탈리아 각지에서 서기관 또는 대리대사로 일하게 되며, 이 동안 그는 시인으로 더욱 알려졌다.
1816년 엑스 레 벵에서 신경 불안증으로 요양하던 중 유명한 물리학자 샤를르의 부인을 만나, 부르제 호수 가에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부인이 병으로 죽자, 라마르틴느는 커다란 슬픔을 맛본다. 쥴리 샤를르 부인과의 비련은 명상시집의 유명한 <호수>,<불멸>,<고독> 등에 나타난다. 그는 <명상시집>으로 국민 시인이 되었고, 이어서 1823년 <새로운 명상시집>, 1825년 <하롤드의 최후의 순례가>, 1830년의 <시적 종교적 조화 시집> 등이 출판되었다. 특히 1829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과 더불어 정계를 떠난 그는 동양을 여행하고 1833년에 귀국, 그 때부터 정치와 문학이라는 이중생활을 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의 임시 정부에서 외무 장관과 임시 정부 수반까지 지냈으나, 1851년 12월의 쿠데타와 더불어 그의 정치 생활은 끝을 맺는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용감한 그는 필경 정치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도 여러 편의 시집을 출간한 일이다. 유명한 도덕적,종교적 서사시 <조슬랭>,<천사의 추락>,<명상록>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저서인 <지롱드 당의 역사> 등이 있다.
알프레드 드 비니 (1797-1863)
시인․소설가․극작가였던 비늬는 군인 귀족 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대혁명으로 몰락했으나, 그는 귀족의 명예를 지키고 영광을 되찾기 위해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왕정의 지지자인 그는 18 세에 총사의 붉은 제복을 입고 루이 18세의 복귀와 망명을 호위하였으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군문은 지루하고 단조롭고 굴종의 연속이었다. 비늬가 비교적 적은 작품으로 낭만파의 4대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시에 깃든 철학적 사상 때문이다. 그는 <극기>, <비관>, <자비>라는 이 세가지의 주된 철학사상으로 보편적 형식을 통해 지극히 개성적인 감수성을 살리면서 상징적인 시를 썼다. 그의 시세계는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데서 시작된다.
1826년에 <근고시집>을 발표하고, 역사소설 <생 마르스>를 출판한다. 1829년에는 세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번안 공연하여 극작가로 명성을 얻지만, 연인인 여배우 마리 도르발의 배신으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는 더욱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의 생애는 환멸의 연속이었다. Emile Faguet는 "영광이나 사랑, 종교나 행복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영광이나 사랑, 행복이나 신을 믿는 것, 그 어느 쪽도 그로서는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타고난 염세적인 고독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 기독교와 삶에 회의를 느끼고, 문단과 사회를 멀리하고 자신의 상아탑에 밖혀서 체험과 사상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의 몇번에 걸친 낙선과 고향에서 대의원 후보 낙선 등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863년 66세를 일기로 그는 고향에서 위암으로 운명한다.
그의 사상의 본질은 고독과 고독에 뒤이어 잉태되는 지독한 고뇌이다. 즉, 직관주의적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볼 때 자연은 냉혹하고, 그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덧없는 인생을 비웃는다. 이처럼 인간과는 달리 영원한 존재인 자연의 오만함은 인간의 미움의 대상이 된다(cf, 목자의 집). 그에게 신이란 "사람들의 호소에는 말이 없고, 눈멀고 귀먹은" 존재일 뿐이며 영원한 아버지도 구원자도 아니다. 비늬는 "순수정신"의 도래와 그 지배를 굳게 믿음으로써 페시미즘마저 극복한다. 결국, 인고의 스토이시즘이 비늬의 철학사상이다. 인간이 무거운 임무를 지고 운명에 대해 불평없이 묵묵히 이를 행하고 죽음 앞에서 용감히 침묵을 지키는 <늑대의 죽음>을 통해서 인고주의를 주창한다. 죽음에 임한 늑대는 오직 침묵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다. 기도하고, 애원하고, 울부짖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와같이 체념하는 것이 시인의 예지이다.
알프레드 드 뮈쎄 (1810-1857)
파리의 부유하고 교양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이 세기아는 인생을 맛보고 즐기기 위해 시를 선택하였다. 18세 때부터 이미 위고의 문학서클에 출입하여 사랑과 촉망을 받았으며, 20세에는 이태리, 스페인의 풍물을 주제로 <첫시집>, <스페인과 이태리 이야기>를, 신비로운 사랑의 모험담, 극적인 멜로 드라마 연극 <안락의자에 앉아 보는 구경> 등을 출판, 문단과 사교계의 찬탄을 한 몸에 받았다.
23세에 30세의 상드를 만나 사랑을 하고, 이듬해 베네치아에서 파탄을 맞이한 이 연애는 뮈쎄의 후반세기의 생활과 작품을 결정했다. 이 사랑과 갈등에 대하여 뮈쎄는 <세기아의 고백>를, 상드는 <그녀와 그 남자>를 쓰게 된다. 뮈세는 멋진 청춘 시인이었으나 사랑의 상처를 받은 후로는 내성적인 깊이를 띠게 된다.
1835년부터 약 6년 동안 '밤'이란 제목의 네 편의 장시를 썼는데 <5월의 밤>, <12월의 밤>, <8월의 밤>, <10월의 밤> 등이다. 이 시들은 고통과 슬픔을 어?게 받아들이고 절망과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의 만년은 비참했다. 30세에 이미 노쇠한 폐인으로 몇편의 단편과 연극 작품을 썼는데, 지나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로 정신과 육체는 이미 망가진지 오래였다.
극작으로는 <처녀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마리안의 변덕>, <사랑을 희롱치 마소>, 역사극 <로렌자씨오> 등이 대표작이다.
뮈쎄는 낭만파의 응석동이요, 무서운 아이로 사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비애>의 끝 부분에서, "이제 이 세상에 남은 나의 유일한 재산은 때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라고 했다.
몽마르트르 근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 옆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묘석에는 그의 시가 새겨져 있다.
빅토르 위고 (1802-1885)
'위대한'이란 형용사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면 빅토르 위고는 이 형용사를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일찌기 앙드레 지드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할 수 없다. 위고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19세기를 풍미한 위고는 긴 세월 동안 위대한 시인, 극작가, 소설가, 사상가였고 투쟁가였다.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중의 양심이었고, 희망의 울림이었으며, 그의 박애주의적 인도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전 유럽 사회에 빛을 던져 주었다.
이미 14세에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무'라고 쓰고 문학에 뛰어든 그는 26세에 시집 <오드>를 출판하여 문단에 데뷰한 이래 1843년 장녀 레오폴딘의 익사로 잠시 문학을 중단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6권의 시집, 3편의 장편소설, 9편의 연극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는 <동방시집>, <가을 나무잎>, <황혼의 노래>, <빛과 그늘> 등이 유명하며, 소설로는 <파리의 성모사원>, 그리고 연극으로는 <크롬웰>, <뤼 블라스>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력적인 그는 창작활동과 동시에 문학 운동을 폈으니, 연극 <에르나니> 공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와 낭만파 싸움에서 사령관인 위고는 학생, 문학청년, 화가, 그리고 네르발, 고티에 등 젊은을 동원하여 승리를 거두고, 당시의 쟁쟁한 시인, 작가들 비니, 뒤마, 메리메, 발작, 생트 뵈브, 네르발, 고티에 등을 중심으로 낭만파 문학서클인 세나클을 조직하여 낭만파 문학의 젊은 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184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으나, 1843년 사랑하는 장녀 레오폴딘이 센느강에 익사하자 딸을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빠진다. 1845년 왕당파로 프랑스 국회 상원이 되고, 1848년 제헌 의회 의원이 되어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편에 서서 자유, 평등, 공화체제를 위한 투쟁에 가담한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 헌법을 개정하자 반대하고,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이 의회를 해산하자 그는 공화파 의원의 첫 체포 대상이 되었다.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하다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고 자유가 회복된 후에야 그는 고국으로 돌아 왔다.
루이 나폴레옹을 매도한 <범죄의 역사, 1852>, <소 나폴레옹, 1852>, 풍자시집 <응징, 1853>, 죽은 딸의 추억이 담긴 <정관, 1853)>, 인간의 서사시 <세기의 전설, 1859)>, 그리고 소설 <레미제라블, 1862)>, 평론 <윌리엄 섹스피어, 1864)>, 소설 <바다의 일꾼들, 1866)>, <웃는 남자, 1869)> 등을 완성시켰다.
만년은 주로 창작생활에 바쳐졌다. 파리 점령과 농성을 다룬 <끔찍한 해, 1872>, <할아버지 되는 법, 1877>, <세기의 전설> 보충편 등등 무한하고 다양한 재질을 보이다가 1885년 83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뜨자 프랑스 정부는 장례식을 국장으로 정하였고, 그의 시신은 파리 시민들의 애도와 추모를 받으며 팡테옹에 안장된다
- 상징주의시
샤를르 보들레르 (1821-1867)
이 세상에는 그 시대나 사회의 목소리나 조류를 잘 대변하는 천재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극히 개성적이며 특이한 천재가 있어, 당대에는 이해되지 않으나 후세에 가서 이해되고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보들레르는 후자의 경우로, 그가 이해되고, 진가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많은 오해와 비난, 박해 뒤에 비로소 근대시의 원조로 추앙 받게 된다.
보들레르는 7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군인인 오픽 장군에게 개가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아버지를 사랑했던 그는 오픽 장군과 뜻이 맞지 않았다. 질서와 규율을 숭상하는 오픽 장군은 이 반항아를 정상적으로 교육시켜 외교관을 만들 노력으로 파리 루이 르 그랑 중학에 입학시켜 좋은 성적을 거두나 졸업을 앞 두고 이 학교를 퇴학해 버린다. 개인 교사의 지도로 바카로레아에 합격 법과대학에 등록했으나 학교에는 가지 않고 파리의 라틴 구역을 배회하며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즐긴다.
파리의 무절제한 생활을 청산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외국 풍물도 접해 보도록 하기 위해 1841년 보르도를 떠나 캘커타로 가는 배에 승선했으나, 인도양의 모리스 섬에서 여행하기를 거부, 결국은 이 여행은 좌절 되었다. 그러나 수 개월 동안의 항해와 남국 열대 지방의 체재는 그에게 이국 풍물과 정서를 담은 시를 남기게 했다. 항해에서 돌아온 보들레르는 건전하고 성실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 반사회적이며 부도덕하게 되어 21세의 성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여 75000 프랑을 받게 되자 그가 동경하던 댄디(멋쟁이)의 호화스런 생활을 즐긴다. 유명한 피모당 호텔에 묵으면서 귀족 같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음주 마약 등을 일삼고 급기야는 성병과 동맥경화증이 생겨나고, 혼혈의 정부인 쟌느 뒤발과의 파란 많은 치정 생활은 그의 정신과 육체를 차츰 마멸시킨다. 이에 당황한 의부는 그를 금치산 선고자로 만들어 버리자, 고고한 시인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며 미술평론 음악론 번역 등으로 겨우 생활을 영위해 간다.
36세 때에 <악의 꽃>이 출판되자 위고는 이 시집이 새로운 전율을 가져 왔다고 격찬했는데, 법원은 풍속 문란이란 죄목으로 삼백 프랑의 벌금과 6편의 시를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그는 유명해졌지만 심한 생활고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깊어만 갔다.
40세에 이미 그는 심신이 쇠잔한 노인이 되었다. 미국의 작가 포우의 작품 번역에 몰두하다가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로 간다. 거기서 조용한 생활과 문학 강의, 자기의 작품 전집을 내기 위해 정리 작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경질환으로 쓰러져 급거 파리로 옮겨졌으나 전신마비와 실어증으로 신음하다가 1867년 여름 생을 마감한다.
폴 베를렌느 (1844-1896)
베를렌느의 생애는 추문으로 얼룩지고 비참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음주와 방랑과 본능적 충동에 휘말려 아내에게는 동성애로 인한 이혼을 당하고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만년에는 가난과 병으로 계속 자선병원 신세를 져야만 하는 신세였다.
폴 베를렌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사이인 메츠에서 태어나 7세 때 파리로 올라와 당시의 보나파르트 중학에서 바카로레아에 합격했으나 진학에는 뜻이 없어, 그가 20세 되던 해에 파리 시청 서기로, 보불 전쟁이 일어나 물러나기까지, 줄곧 같은 자리에서 일을 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시를 쓰는 것이었으며, 유일한 즐거움은 퇴근 후 카페에 들러 압생트를 마시며 친구들과 문학과 세상사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가 <토성인 시>와 <우아한 잔치>를 출판 하자, 위고를 비롯, 일부 시인들은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마틸드 모테라는 16세 소녀와 결혼했다. 이 아름다운 심경을 노래한 시집이 <기쁜 노래>이다. 그러나 그는 결혼한 지 일년도 못되어 랭보라는 그보다 10년 아래인 17세의 천재아를 만난다. 그는 아내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벨기에 영국 등지를 방랑하며 동거 생활을 하다가, 둘 사이의 갈등으로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브뤼셀에서 권총을 발사, 부상을 입히고 몽스 감옥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른다.
1875년부터 옥중 생활로 참회하고 새사람이 된다. 그는 감옥에서 <가사 없는 노래>를 썼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의 시집 <예지>와 몇편의 시 속에는 이 때의 종교적 체험을 순수하고 솔직하게 담고 있다.
감옥을 나온 후 그는 새사람이 되어 영국과 벨기에의 시골 중학 선생이 되어 불어와 영어를 가르쳤지만,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린 사탄이 고개를 들어 다시 술을 마시게 되고 본능적 충동과 욕구가 그를 엄습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파리로 올라온다.
파리에서의 그의 생활은 비참했다. 어려운 동안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그의 시학이 들어있는 <옛날과 지금>, 그리고 당시 문단에서 참다운 가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코르비에르, 빌리에 드 릴르 아당, 말라르메, 랭보와 자신 등 불행한 시인들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저주받은 시인들>은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이들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활발해 진다.
만년에 젊은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와 데카당파의 시인들 사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시의 왕'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1896년 그는 52세로 빈민굴의 하숙에서 창부의 팔에 안겨 쓸쓸하게 죽었으나, 그의 유해는 운집한 시인, 화가, 문인, 배우 등 그를 숭배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바티뇰 묘지로 갔다.
아르튀르 랭보 (1854-1892)
아르튀르 랭보는 그의 광란적 방랑, 몇 편의 파격적인 시, 그리고 문학에 대한 그의 돌연한 단절이 너무나 기이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나 생에 대해 참으로 구구한 평가와 추측이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16세에서 20세 안팎까지 단지 4년 동안에 문학으로 이루고자 했고, 남겨진 몇 편의 시작은 너무나 새롭고 강열하고 깊이가 깊어서 가히 천재적이라 할 것이다. <지옥의 계절>, <일뤼미나씨옹>을 접한 폴 클로델은 이를 참다운 계시라 했고 앙드레 브레통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서 추앙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실존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그의 인간과 작품은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아르튀르 랭보는 북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의 소도시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지극히 평범한 변화 없고 보수적인 도시로 랭보는 이미 주위에 대한 반항심을 느꼈으며, 그가 자라난 가정에서도 카톨릭교의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강요하는 어머니 아래 숨막힐 듯한 유년기를 보냈다. 성장함에 따라 그의 마음 속에는 가정과 도시, 현실에 대한 혐오와 반항심을 누를 길 없어 여러번 고향을 탈출한다. 어떤 때는 책이나 시계를 팔아서, 어떤 때는 무임승차나 걸어서 벨기에, 프랑스 등지를 방랑하였으나 그 때 마다 체포, 투옥되고 되돌아 와야만 했다. 다른 곳으로의 탈출 기도와 방랑에 대한 동경은 일종의 숙명적 양상을 띠고 있다.
1871년 가을, 네 번째의 탈출로 파리에 오게 된다. 베를렌느의 도움으로 그는 파리 시단에서 <취한 배>를 낭송하고 그의 시재를 인정받는다. 베를렌느와 이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후 약 5년간 지속된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결국 1873년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권총 발사로 끝이 나고 랭보는 다음 해인 1874년 끝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이 때까지 두 시집 <지옥의 계절>과 <일뤼미나시옹>을 끝냈는데, <지옥의 계절>은 브뤼셀 출판사에서 자비 출판했으나 <일뤼미나시옹>은 베를렌느의 주선으로 출판된다.
1874년 이후부터 랭보는 문학을 버리고 일대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시나 문학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한 그는 제르멩 누보와 함께 영국, 독일, 이태리, 북 유럽 등지를 떠돌아 다니다, 1880년에는 완전히 유럽을 떠나 아라비아의 아든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약 9년 동안 이디오피아의 아하르에서 상사 대표로 있으면서 탐험과 무기 무역에 종사하였다. 1891년 오른쪽 다리를 마르세이유 병원에서 절단하고 그 해 11월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청년 아르튀르 랭보는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성질은 거칠고 난폭하며 모든 일에 조소적이며 반항적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누를 길 없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욕구가 용광로같이 타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제약이나 구속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 미지의 것, 생명적인 것을 찾으려는 격렬한 충동과 욕구가 있었다. 그가 가정을 뛰쳐 나오고, 방랑을 일삼고, 종교를 모독하고, 일시적이나마 사회주의에 경도하고, 동성애에 빠지고, 스스로 조악한 행동을 한 것은 모두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시인이 되고 문학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것은 그가 말한 "견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 진정한 생,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젊은 랭보는 스스로 견자가 되기 위하여 진지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알콜, 환각제의 사용, 동성애, 무의식 세계의 탐구, 자발적 환상 상태의 조작,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미지의 세계,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새로운 세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큰 병자, 큰 죄인, 큰 저주받은 자가 됨으로써 최고의 지자가 되어 우주와 절대세계를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랭보는 자기가 보는 미지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감각에 통하는 시적 언어를 만들려고도 하였다. "향기, 소리, 빛깔 등은 모든 것을 요약하는" 언어이다. 그가 언어의 연금술이라 부른 이 기도는 일찌기 보들레르가 시도한 바 있거니와 빛깔의 소리를 듣고 소리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감각적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다. 랭보는 보들레르의 시도를 극단까지 추진했다. 그의 후기 작품 <지옥의 계절>과 <일뤼미나시옹>은 이러한 노력과 모험의 기록이다. 이러한 기도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이러한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결사적 노력, 그리고 새로운 감각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출하려고 한 정신적 노력은 시에 대한 새로운 사명과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 (1842-1898)
스테판 말라르메는 문학사조로는 상징파에 속하나 그는 순수시, 시의 이상적 형태를 위해 일생을 바친 수도사와 같은 존재였다. 말라르메는 파리 하급 공무원 가정의 출신으로, 5세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재혼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학교 시절부터 심약한 그는 고독과 벗하여 몽상과 시쓰기를 즐겼다. 성인이 된 말라르메는 시골 중학교 영어교사로 평범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나, 교사직은 생활 수단이었을 뿐 그의 참다운 생은 시에 대한 사색과 탐구였다.
그는 20세부터 시를 발표하여 1866년 <현대 파르나쓰 파>에 시를 발표하고 문단의 주목을 끈다. <창문>, <창공>, <바다의 미풍> 등은 이 때의 작품이다. 1868년 <에로디아드>와 1876년 <목신의 오후>를 발표한다. 이 두 시는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그의 특이한 사상과 정밀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은 난해하여 전체적 이해와 통일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1884년 베를렌느가 그의 시인론 <저주받은 시인들> 가운데 말라르메의 시에 대한 연구를 게재하였고, 위스망스가 그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 말라르메의 시 <에레디아>에 압도되었다는 대목이 널리퍼지면서 그의 이름은 유명해 지고, 젊은 상징파 시인들이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삼는다.
그의 탁월한 시론에 힘입어 1880년대에는 당시의 시인들 라포르그, 레니에, 바레스, 클로델, 지드, 발레리 등이 그의 가치를 인정한다.
말라르메는 난해한 장시, <데 제녗트를 위한 산문>를 발표하는데, 데 제녗트란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다. 난해한 이 시는 상징파 시인들에게 관심을 주었을 뿐이다. 이제 그의 이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퍼지고 그의 작품들은 각국에서 번역, 출판 된다. 1896년에는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베를렌느에 이어 시인왕으로 추대된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우아하고 절제있는 성품으로 불행한 시인들을 돌보아 주는 고결한 품성의 소유자로 비록 시론이 그와 다른 사람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97년 그의 예술론인 <여담>과 같은 해 5월에 발표한 <한번의 주사위가 우연을 없앨 수는 없으리>가 발표되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시는 여전이 난해한 채로 일반에게는 이해되지 못한다.
1898년 9월 8일 파리 근교의 발방에 있는 시골집 서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쓰러진 그는 다음날 아침 영원히 절명하였으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 현대프랑스시
폴 발레리 (1871-1945)
폴 발레리는 남 프랑스 지중해 연안 세트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코르시카, 어머니는 이태리 제노바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 황혼의 땅인 북 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타고났고 그 속에서 자랐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성적이며 정적인 정신을 말한다.
그는 몽펠리에 법과 대학에 수학하는 동안 우연히 피에르 루이스를 만나게 되고, 그의 주선으로 앙드레 지드, 말라르메와 알게 된다. 그러나 1892년 10월 어느 밤 그는 거의 계시와 같은 심적 동기로 인해 일체의 문학이나 시작에서 손을 떼고 사색과 성찰의 생활로 들어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사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17년 동안 문학이나 창작 방면에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추상적 과학적 연구 방법에 전념했는데, 이 동안에 얻은 지적 작품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방법 서설, 1895)>, <테스트씨와의 저녁시간, 1897)> 등이다.
그의 속에서 잠자던 시의 여신이 다시 깨어난 것은 그 후 20년이 지난 1913년 그것도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지드의 권고로 512행의 <젊은 여인 파르크>를 5년 간에 걸쳐 출판한다. 이 작품은 난해하였지만 지적 엘리트들로부터 세기적인 시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걸작 <해변의 묘지>는 <젊은 파르크>가 발표된 지 3년 후의 작품이다. 그는 다시 1922년 <젊은 파르크> 이후의 시들을 모아 <매혹>이란 제목으로 출판한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공인한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바리에떼> 5권, <있는 그대로> 2권, <현세계에 대한 고찰>, <예술론> 등이 있다.
만년에 그는 국제적 시인이 되었으며, 192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펜 클럽 회장 직과 콜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임명되어 시학 강의를 하였으며,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한다. 심신이 쇠약해진 그가 1945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나자 정부는 장례식을 국장으로 거행, 유해는 세트의 해변 묘지에 묻혔다.
시인으로서 발레리는 보들레르, 말라르메를 잇는 심미적 상징주의 계보에 속하며, 주지적이며 기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에 따르면 시는 산문과 달라서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 감흥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시는 언어가 가진 모든 능력을 구사하여 독자의 마음 속에 어떤 미의 감각, 조화의 세계를 낳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의 모든 힘(음, 리듬, 음률, 낱말과 낱말의 접근과 대조, 이미지, 상징, 비유 등등)을 구사하여 이러한 미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하학자, 건축가, 지성인이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감이나 정열이 아니라 맑은 의식과 각고면려하는 노력이라고 했다. "나는 무아 상태에서 번개불을 기다리느니보다 맑은 정신, 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기욤 아폴리네르 (1880-1918)
로마 태생인 확실치 않은 아버지와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욤 아폴리네르는 향락과 도박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따라 칸느, 니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세에 파리로 올라왔다. 독일 가정교사로 일하는 동안 가정교사로 있던 영국 소녀 에니 플레이든과 사랑에 빠지고 얼마 안되어 실연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이 때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가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이다. 파리로 돌아와 신문기사나 잡지에 글을 기고하다 앙드레 살몽, 막스 쟈콥 등 문인들과 문예지를 펴내기도 하고, 화가 피카소, 브라크, 블라멩크 등 소위 당시 화단의 전위파들과 친교를 맺기도 한다. 특히 그는 전위파 예술 운동의 선두에 서서 입체주의, 미래파, 흑인 예술, 환상파 그리고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유파나 '이즘'이 나올 때 마다 선구적 이론가였다. 쉬르레알리즘이란 낱말은 그의 창작이다. 1931년 그가 33세 때 첫 시집 <알콜>이 출판되어 성공하였다. 1차 대전을 전후한 무겁고 음울한 유럽 사회에 새롭고 신기하고 경쾌하고 애수 섞인 유머는 인기가 있었다. 소위 새로운 정신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원 출전하여, 1916년 포탄의 파편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어 두번이나 뇌수술을 받고 결국은 1918년 39세를 일기로 죽어 갔다.
그는 두 시집 <알콜>과 <칼리그람>을 남겼는데, <칼리그람>이란 단어도 그가 만든 새로운 단어이다. <알콜>에는 그가 겪은 실연이 서정적이며 회고적인 엘레지와 그가 본 세상에 대한 스냅 사집에다 그의 독특한 꿈과 환상과 무의식을 병치 혹은 뒤섞은 현대적인 시들이 들어 있다. 그는 시에서 일체의 구두점을 빼버려 시구의 리듬을 완전히 유동화 시켰는데, 이는 상드라르의 시를 읽고 받은 충격으로 전해진다. 상드라르가 무의식적으로 부분적으로 한 일을 아폴리네르는 의식적으로 전적으로 한 것이다. 이후 많은 현대 시인들이 구두점이 없는 시를 쓰고 있다.
<칼리그람>에는 그가 <알콜> 이후 추진해 오던 새로운 혁신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카페의 소음 속에서 들리는 대화를 주워 모은 소위 대화시라든가 추상파 화가의 수법을 시에 적용시킨 추상시들이 들어 있다. 그는 이 시집에서 상형적인 요소를 시도하고 있는데, 즉 시를 구성하는 활자나 활자로 구성되는 시구의 배치로 어떤 형상을 나타내어 무언 중에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시행으로 일종의 그림을 그려서 독자의 시각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심장은 하트 모양, 시가는 여송연 담배 모양, 분수는 물이 분출하여 떨어지는 모양으로 배열하였다. 시각과 청각을 함께 배합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사람들을 놀라게 즐겁게 하였으며 그의 사후 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가 시에서 시도한 새로운 정신과 형식의 추구는 20세기 시의 나아갈 길에 대해 큰 시사와 문제를 남겨 주었다.
쟝 꼭도 (1889-1963)
Mon oreille est un coquillage
Qui aime le bruit de la mer
경쾌하고 신기하며, 때로는 신비하기까지 한 시나 소설을 써서 세인들을 놀라게 한 쟝 콕도는 20세기 초반 문단의 총아로, 그는 파리 명문 가정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20 세에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내어 문단과 일반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실로 다재다능하여 문필 뿐만 아니라 미술て조각て연극て영화て발레 등 다방면의 예술 창작 활동을 했고, 작품들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었으며, 문제작이 되었다. 그는 영화 <비련, 1943)>, <미녀와 야수, 1945)>와 <오르페, 1949)> 등의 제작자로도 유명하다.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 시집 <희망봉, 1919)>, <평조, 1923)>, <오페라, 1927)> 등을 발표하고, 이 후에 그는 상당히 긴 공백 기간을 이용하여 소설て수필て연극て영화て데셍 등에 몰두하였다. 다방면에 걸친 마술사 같은 그의 재능은 실로 종횡무진하여 전기의 활동 이외에도 교회의 내부 장식, 색종이로 붙인 회화, 러시아 발레에서 샤넬의 의상 고안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41 년에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알레고리(Allegorie, 1941)>, <레온느, 1945)>, <포엠, 1948)>, <7수, 1952)>, <명암, 1954)> 등의 시집이 발표 되었다. 그의 시풍은 시집마다 경향을 달리하여 각각 전위적て미래적て초현실적て환상적て 주지적て고전적 등등의 평을 받았으나, 본인은 시에 필요한 것은 시 정신이지 유파가 아니라고 응수했다. 그런데 <레온느>라는 시집은 죽음의 찬가이다. 콕토는 60이 훨씬 넘어서도 그의 시 정신은 변치 않았다. 새로운 것, 이상한 것, 마술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계속 각 방면에서 추구되었다. 이 시기의 시집으로는 <페닉스의 스페인 의식, 1961)>, <진혼곡, 1962)>이 있다. 195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앙드레 브르통 같은 시인은 그를 사기사로 혹평하였으나, 차츰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독창적인 위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의 작품의 표면 뒤에 진정한 시인, 날카로운 지성의 시인을 발견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이 예술의 곡예사가 늘 고독과 허무와 죽음의 깊은 늪을 보아 온, 심각한 작가라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 주인에서부터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짧으나마 경건한 카톨릭 신자가 되기도 한 콕토는 실로 복잡하고 모순되고 항상 변하고 알 수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폴 엘뤼아르 (1895-1952)
폴 엘뤼아르는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파리 북쪽 교외에 있는 쌩 드니에서 출생 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중고등 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1911년에서 1913년까지 스위스의 다보스의 사나토륨(요양원)에서 지내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의 작품을 읽게 되고 특히 미국 시인 휘트만의 시를 좋아하여 시 쓰기를 시작했다. 소년 엘뤼아르는 여기에서 러시아 태생의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며, 4년 후인 1917년 결혼으로 이어지는데 후일 그가 애칭으로 갈라라고 부른 여인이다.
1914년 제 1 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엘뤼아르는 야전 병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맛보았고, 전시 중 병원에서 <평화를 위한 시>을 자비 출판하였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한 때 짜라와 당시 유행하던 다다이즘 운동을 벌였고,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데스노스て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운동을 이끈다. 이 새로운 문학 정신이 그의 시에 준 영향은 크다. 1920년에서 1936년까지 그는 브르통이나 르네 샤르와 공동으로 여러 권의 초현실주의 시집과 평론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으므로 죽는 일, 1924)> 및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통의 수도, 1926)>, <사랑, 시, 1929)>, <직접적인 생, 1932)>, <모든 사람의 장미, 1934)> 등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점차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보이고 인류와 정의를 위한 연대 운동에 가담한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게르니카의 승리, 1938)>를 발표하였다. 이 동안 인간애와 자유를 노래 부른 시집에 <풍요한 눈, 1936)>, <자연의 흐름, 1938)>, <볼 것을 준다, 1939)> 등이 있다. 1940년 제 2 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엘뤼아르는 자유와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194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독비밀 저항 운동에 가담하였고, 비밀 출판물인 <심야 총서>를 간행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동안에 그는 시집으로 <시와 진실, 1942)>(이 시집에 유명한 시 '자유'가 실려 있다), <전쟁 중의 일곱 편의 사랑의 시>, <독일인의 집합지에서> 등이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 편대가 수천 부의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 아래 싸우는 프랑스의 마키자르(항독 투사) 위에 뿌렸다. 시가 무기가 된 것이다. 대전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고취하고 계속 시집을 펴냄으로써 자유와 인간애를 노래 불렀다. <그치지 않는 시, 1946, 1953)>, <정치 시편, 1948)>, <도덕의 교훈, 1949)>, <모든 것을 말한다, 1951)> 등이다. 그가 세계와 인류와의 연계를 주장하는 소위 참여 문학에 가담하였다고 하나 그의 시는 계속 개성적이며 서정적이고, 그의 시의 주제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과 죽음て평화て자유였다.
1946년 아내의 죽음 이후 한때 절망으로 실어증에 빠졌으나, 인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희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1949년 도미니크라는 여성을 만나 재혼을 하고, 시집 <불사신>(사후 출판)을 써서 생의 기쁨을 되찾은 행복을 노래했다.
1952년 엘뤼아르는 과로와 협심증으로 급서한다. 그의 유해는 전세계의 지식인과 문인의 애도를 받으며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루이 아라공 (1897 - )
20세기를 거의 살아오면서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그는 확실히 현대의 위대한 작가이다. 그러나 아라공이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제 2차 대전에서 독일군에게 패배한 프랑스의 슬픔과 분노와 저항을 나타낸 시들과 또한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여성인 엘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그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자유와 희망을 노래한 시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라공은 청년 시절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가담하여 핵심적 인물로 활약했고, 이때의 시집으로는 <기쁨의 불, 1920)>과 <Mouvement perpetuel, 1925>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이며 전투적인 그는 환상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주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결별한다. 그리고 1927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만, 모든 것에 허무를 느껴 한때 자살을 기도한다. 이 암담한 시기에 만난 여인이 바로 엘자 트리올레였다. 엘자는 그의 작품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라공이 시인으로서 특히 프랑스 민중 시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나타낸 것은 1940년 전후의 상황시와 사랑의 시에서이다. 1940년 5월 그의 조국 프랑스는 무너졌다. 이 허망과 절망 속에서 그는 패배하고 점령당하고 자유를 잃은 프랑스의 설움과 분노와 희망을 노래 부른 것이다. 아라공은 전쟁을 전후하여 항독운동을 전개하며 <단장의 아픔, 1941)>, <엘사에게 주는 송가, 1942)>, <엘사의 눈, 1942)>, <브로셀리 앙드의 숲, 1942)>, <그레뱅 박물관, 1943)>, <프랑스의 기상 나팔, 1946)> 등을 발표한다. 이 시들은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느끼고 있던 슬픔て분노て사랑て희망의 감정을 호소하기 위해 시의 주제나 형식을 프랑스의 옛 전통과 국민감정을 담은 중세의 무훈시て기사담て또는 샤를르 도를레앙て도비네て비용 등의 시에서 취했고, 그들의 리듬과 형식을 본떠 일반 대중들이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국민의 대중의 시인이 되었다.
프랑스 국민은 그 속에서 상처입은 조국의 한탄의 목소리를 들었고 애인에 대한 사랑에서 조국애를 느꼈고 분노와 반항과 희망의 노래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만년에도 계속 시て소설て에세이 등을 써 왔고 1958 년에 발표된 역사 소설 <성주일>은 그의 소설 가운데 걸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시집으로는 <미완의 소설, 1956)>, <침실, 1969)> 등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 자서전 <나는 글쓰는 법이나 첫 머리말을 배운 적이 없다, 1969)>가 발표되었다. 한편 그의 영원한 여성 엘사는 1970년 그의 팔에 안겨 죽었으나 엘사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고 그의 작품 가운데 계속 살아 있다.
쟉크 프레베르 (1900-1977)
자크 프레베르는 파리 서쪽 변두리 태생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 세때부터 시장과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시나 예술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26년에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브르통이나 아라공 등과 뜻이 맞지 않아 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후부터 그는 그의 동생인 피에르 프레베르와 친구 마르셀 뒤아멜 등과 더불어 영화 시나리오, 샹송의 작사자로 활약하였다. 후일 마르셀 카르네와 <제니의 집, 1936)>, <안개 낀 부두, 1938)>, <저녁 방문객, 1942)>, <천국의 어린이들, 1945)>, <밤의 문, 1946)> 등 유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바르바라> 등 많은 샹송 가사도 지었다.
1946년 출판사 <신문학 평론>에서 그의 옛 시를 모아 <말>이란 시집을 내어 프레베르는 하루 아침에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구경거리, 1951)>, <비와 좋은 날씨, 1955)>, <잡동사니, 1965)> 등 세 권의 시집을 내놓는데, 여기서도 그의 기지와 서정과 반항과 허무의 불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시인으로 뿐 아니라 영화て사진て샹송 방면에서 일하였으며,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많은 동화를 출판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는 1977년 4월 북부 프랑스의 셸브르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프랑스어의 전신인 로망어로 쓰여 전해지는 문학작품다운 첫 문헌 《알렉시스 성자전(聖者傳)》 등이 11세기의 것인 만큼 이 무렵을 프랑스문학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틴어로 쓰인 문헌들이 그 이전부터 있었고, 그것이 방대한 문학의 보고임은 사실이나 교회학자들의 세계 속에 갇혀 있어 민중과는 담을 쌓아왔다는 특이성 때문에 한 국민의 문학에서는 제외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문학은 프랑스의 국토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에 국한되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프랑스문학의 특징은 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된다. 투철한 대화 정신이 우선 어느 국민보다도 돋 보인다. 이치를 따지기 좋아해 담론 ․비판을 즐기는 기질, 앙드레 지드가 지적했듯이 논리를 진리보다도 사랑하는 성향은 데카르트적인 사고의 합리성과 문체의 명석함을 낳아 형식의 조화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고전주의 문학을 싹트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기에 걸쳐 고루 활 발한 문학이론 논쟁을 통해 다양한 비평문학을 꽃피게 함으로써 언제나 프랑스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내는 기수 노릇을 도맡아 왔다. 대화의 정신은 한편으로 서로 어긋나는 요소들을 절충 ․조절하는 구실도 한다. 수다스러워 경박으로 흐르기 쉽고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지나쳐 우스꽝스러운 유행에 들뜨거나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으로 치닫는가 하면, 거의 모든 국민이 가톨릭 신자로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인 면도 있어 그 문학은 매우 복잡다양하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 같은 특출한 대표자가 없는 대신, 전체의 수준이 골고루 높아 작품 들의 질과 양이 어느 세기에나 고르며, 지배나 통제에 의한 획일이 아니라 절제와 조화에 의한 개성의 다양성을 견지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 를테면 모순이나 갈등의 해결에 있어 대화를 통한 절도와 균형을 존중하는 가장 현실주의적인 문학이다. 현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조건에 충 실하다는 뜻에서 인간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인간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바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특히 17세기에 하나의 주류를 이루어 모랄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문학자들을 속출시켰다.
라 로슈푸 코의 경우에서처럼 인간본성의 약함이나 약함의 고발에 치우쳤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철저했던 모랄리스트들의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는 다른 모 든 문학분야에도 배어들어 프랑스문학이 전반적으로 모랄리스트 문학으로 통칭되기에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실존주의 문학이나 구조주의 문학에서도 뚜렷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류의 한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해 그러한 인간을 이해 하는 가장 인간다운 방편이 문학이라는 자각에서 문학이 바로 문명이라고 할 정도로 문학을 존중하는 국민기질이 프랑스문학의 풍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이와 같은 보편화 현상은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각급 학교에서의 꾸준하고도 빈틈 없는 문학교육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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